차한성 "국외송달 핑계로 징용소송 늦추자"…靑에 제안

입력 2018-08-21 07:01
차한성 "국외송달 핑계로 징용소송 늦추자"…靑에 제안

양승태 사법부, 이미 구상한 '재판지연 계획' 김기춘에 설명

행정처·외교부·전범기업, 물밑 작업으로 재판 늦춘 정황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소송 서류의 국외송달을 핑계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소송을 자연스럽게 늦추는 방안을 제시한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이는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김 전 비서실장과의 이른바 '공관 회동'에서 소송을 지켜보던 청와대의 뜻을 단순히 전달받은 게 아니라 재판거래를 위한 구체적 실행계획과 경과에 관한 설명을 미리 준비해간 단서라고 검찰은 보고 있다.

21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차 전 처장은 2013년 12월1일 오전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서 김 전 실장을 만나 "국외송달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징용소송의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길 수 있다"는 취지로 제안했다.

국외송달은 소송 관계 서류의 내용을 당사자에게 서면으로 알리는 여러 가지 송달 방법 중에서 재외공관 등을 통해 해외에 있는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재판거래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신봉수 부장검사)는 지난 2일 외교부에서 압수한 각종 문건과 당시 회동에 배석한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의 진술 등을 토대로 차 전 처장이 직접 국외송달 방식을 제안한 정황을 확인했다.

당시 공관 회동은 같은 해 11월 말 "징용소송이 2012년 대법원 판결대로 결론 나면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김 전 실장이 소집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실장은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전원합의체에 넘겨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기존 판단을 뒤집어달라고 요구했다. 차 전 실장은 여기에 국외송달이라는 절차적 문제를 구실 삼아 자연스럽게 청와대 뜻을 관철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화답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소송의 재상고심은 같은해 8월9일 대법원에 접수됐다. 한해 전 대법원 판결과 쟁점이 달라지지 않은 탓에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대법원은 회동 직후인 12월10일 심리불속행 기간 4개월이 지났다고 선언했다.

심리불속행이란 형사사건을 제외한 대법원 사건에서 2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더 판단하지 않고 곧바로 기각하는 처분이다.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기면 재판은 그만큼 뒤로 미뤄진다.

검찰은 공관 회동에서 논의된 재판 지연 방안이 차 전 처장의 개인적 구상이 아니라 법원행정처 차원의 치밀한 계획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에 재상고심이 접수된 직후인 같은 해 9월 문건에서 "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주자"며 피고 대리인을 통해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받는 방안 등을 구상했다. 국외송달을 핑계로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기는 방안도 같은 문건에 등장한다.

이어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같은 해 10월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을 찾아가 징용소송 경과를 설명하면서 법관 해외파견을 늘려달라고 청탁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국외송달을 사유로 심리불속행 기간을 일부러 넘겨 강제징용 관련 소송의 재판을 늦추는 일과 법관 해외파견을 늘리는 일이 사법부와 청와대·정부 사이의 흥정을 통해 성사된 점을 보여주는 정황이라고 검찰은 보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소송기록은 국외송달 절차를 거쳐 이듬해 5월7일에야 신일철주금 측에 도착했다. 신일철주금은 5월26일 소송위임장과 상고이유서를 냈다. 심리불속행 기간을 6개월 가까이 넘긴 뒤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상고기록을 받은 날부터 4개월 이내에만 심리불속행 판결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기간을 넘겨 상고이유서가 적법하게 제출된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심리불속행 판결을 할 수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신일철주금의 대리인이 법원행정처 등과 교감 속에 소송위임장 제출을 늦춘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법원행정처와 외교부, 전범기업 측이 물밑 작업을 벌여 고의로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긴 것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12월의 공관 회동은 정부 입맛에 맞게 재판을 지연시키는 구상을 상당 부분 실행에 옮긴 다음 청와대 측에 경과를 설명하는 자리의 성격도 짙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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