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무죄'로 불붙은 법개정 논의…'비동의 간음' 화두로

입력 2018-08-16 17:23
수정 2018-08-16 18:59
'안희정 무죄'로 불붙은 법개정 논의…'비동의 간음' 화두로

유엔위원회·법무부개혁위도 "피해자 거부의사로 강간죄 판단" 권고

'미투' 이후 국회에 개정안 다수 계류…"安, 현행법으로 처벌 가능" 의견도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이효석 기자 =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을 계기로 여성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과 같은 '비동의 간음죄'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노 민스 노 룰은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드러냈는데도 성관계가 이뤄졌다면 이를 성폭행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1990년대 캐나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온 캠페인 구호로, 지인에 의한 강간이나 데이트 성폭력 피해 등을 막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됐다.

한발 더 나아간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룰도 있다. 약물 등에 의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폭행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보호해야 하므로, 명시적인 동의 의사표시 여부로 강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두 규범 모두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를 범죄로 처벌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성폭행이 성립하는지를 따지는 국내 형법은 국제기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법원은 폭행이나 협박 정도가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는 수준에 이른 경우에 유죄를 인정하는 사례가 많았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지난 3월 형법 제297조가 명시한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기준보다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 없이'라는 기준을 넣어 이를 우선시하도록 수정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도 지난 6월 상대방이 반항할 수 없게 하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규정한 형법 제297조가 피해자 권리보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강간죄 처벌 기준으로 삼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마음속으로 (성관계에) 반대하더라도 현재 우리나라 성폭력 처벌 체계에서는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 볼 수 없다"며 안 전 지사의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를 선고하고 싶어도 현행법에서는 처벌할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취지의 재판부 언급이 나오면서 현행법 개편 요구에 불을 댕겼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 촉발 이후 현재 국회에는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관계를 성폭행으로 인정해 처벌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여럿 계류돼 있다.

민주평화당 천정배 의원은 지난 3월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동의 없이 사람을 간음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자유한국당 홍철호 의원이 낸 형법 개정안도 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강도강간죄에 한해 '사람의 의사에 반해 강간한 경우'를 범죄 성립 요건으로 추가했다.

유럽 일부 국가와 미국 일부 주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강간·추행죄 성립의 주요 판단 요건으로 삼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2016년 집단 성폭행 사건에 법원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 것을 계기로 분명한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최근 발의되기도 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비동의 간음죄 신설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는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맥이 닿는다.

아울러 비동의 간음죄는 피해자 중심적 관점에서 성폭력 범죄에 접근하는 법인 만큼, 가해자로 지목된 쪽에서도 억울함이 없도록 범죄 구성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기된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 쪽에서 '적극적 동의를 받았다'는 걸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진녕 변호사는 "비동의 간음은 범죄 성립 여부가 상대방의 동의 여부에 달린 것인데, 구성요건 명확성 원칙에 어긋날 소지가 있어서 위헌 소지의 다툼 가능성이 있다"면서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무엇을 처벌하는지 명확하도록, 공리공론에 그치지 않게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안 전 지사 사건이 현행법으로 충분히 처벌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주장도 여성주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1심 재판부가 입법적 해결을 언급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안희정 사건은 전형적인 '위력 간음'의 상황이므로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으로 처벌해야 하는 사건"이라면서 "비동의 간음죄도 당연히 신설해야 하지만, 이번 사건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현행법에 나온 '위력'을 좁게 해석하지 않고 넓게 해석하면 안 전 지사 사건도 유죄로 인정될 수 있으며, 이를 입법적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견해다.

형법 303조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법조계에서는 판례에 비춰볼 때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조직 상사와 부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명확하지 않고 생각보다 미묘한 상황이 많기 때문에 업무상 위력이란 것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p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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