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벼도 내 마음도 다 타들어 가…추석 차례도 못 지낼 판"
(함평=연합뉴스) 장아름 기자 = "저기 누렇게 보이는 게 벼가 익은 것이 아니라 다 타버린 거에요. 볼 때마다 제 속도 천불이 납니다."
전남 함평군 함평읍 가동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박모(59)씨는 16일 지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4월 파종을 시작하고 5월부터 모를 심은 조생종 벼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벼 줄기에는 좀처럼 이삭이 보이지 않았고 벼 끝 부분이 누렇게 혹은 붉게 타들어 가 있었다.
붉게 그을린 박씨의 얼굴과 굳은살이 박힌 손만이 지난날의 고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함께 있던 이장 김지판(71)씨는 "추석 전인 9월 중순∼9월 말 조생종을 수확해 햇곡식을 차례상에 올려놓는데 올해는 다 타버려 차례 지낼 곡식도 없게 생겼다"고 말했다.
김씨는 다른 논을 보여주며 "이렇게 벼꽃이 피어 있는 곳은 올해 농사가 다 끝났다고 봐야 한다. 벼꽃이 필 때 평소보다 물이 훨씬 많이 필요하다. 뒤늦게 물을 주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설명했다.
벼는 꽃이 필 시기에 물과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해야 이삭이 튼실하게 자랄 수 있다.
사상 최악의 폭염과 가뭄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논으로 댈 물을 끌어다 쓰던 개울이 말라버렸고 마을의 젖줄과도 같았던 저수지도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불과 6월까지만 해도 수위가 높았던 저수지는 지금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있었다.
박씨와 김씨 등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 약 3km 길이의 지하수 배관을 연결했지만 이마저도 말라버려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가뭄이 워낙 심한 데다가 일조량이 많고 기온이 높아 평소보다 2배 가까이 물 공급이 필요해 살수차를 동원해도 바닥이 금세 말라버리기 일쑤다.
한동안은 한정된 물을 가지고 논작물과 밭작물 중 택일해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최근에는 둘 다 공급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함평군에 따르면 논작물(수도작) 92.55ha와 들깨, 콩, 고추 등 밭작물(전작) 273.31ha가 폭염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벼의 경우 전체의 1.3%, 밭작물의 경우 전체의 19.8%가 폭염으로 고사 위기에 놓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폭염과 가뭄이 일주일만 더 지속하면 농작물 피해는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박씨와 김씨 등은 이날 폭염 피해 현장을 방문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와 최고위원들을 향해 "해마다 폭염과 가뭄이 심해져 농민들이 지하수를 개발해 쓰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안정적으로 물 공급이 가능한 양수장과 저수시설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정동영 대표는 "함평과 무안, 신안, 영광 등을 지나는 영산강 수계에 양수장 13곳, 용수로 487km 등을 갖추는 영산강 4지구 사업이 17년 전 착공 후 미뤄져 용수 공급에 차질이 있는 만큼 예산 투입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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