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후손 "친일 청산 전혀 안됐다…독립운동사 다시 써야"

입력 2018-08-14 18:49
신채호 후손 "친일 청산 전혀 안됐다…독립운동사 다시 써야"

며느리 이덕남 여사 "애국지사 후손들 해방 이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힘 당해…이제라도 예우해야"

"해방후 친일파 독립운동가로 가면 바꾸기도…반민족 행위자 걸러내는 작업 이뤄져야"



(베이징=연합뉴스) 김진방 특파원 = "한국의 친일 잔재 청산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하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74) 여사는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은 앞다퉈서 건국공로훈장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가면을 바꿔썼지만,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져 투신한 애국지사의 후손들은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지금도 현충원에 가보면 일제 강점기 반민족 행위를 한 인사들은 버젓이 애국지사로 탈바꿈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17만 명이 넘는 애국지사들은 독재정권은 핍박에 후손들의 발길이 끊긴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면서 "지금이야 시대가 변했지만,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 속에 삶을 살아내야 했고, 독립운동가 자손이라는 것을 숨긴 채 살아야 했던 탓에 선열의 묘조차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몰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어 "이제라도 친일파 청산과 함께 암적 존재처럼 독립운동사에 자리를 차지한 반민족 행위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며 "현재의 상태라면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라고 강조했다.

이 여사는 1966년 단재 선생의 차남 신수범 선생과 결혼한 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위암 판정을 받고 건강이 악화해 2004년 딸이 사는 베이징에서 지내고 있다.

이 여사는 시아버지인 단재 선생과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신수범 선생으로부터 단재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단재 선생은 잘 알려진 대로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건업신문을 창간하고, 이후 27년간 중국 각지를 돌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특히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선생은 베이징에 머물던 시기에 당시 북경시보, 북경신보 등에 사설을 써내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이 여사의 남편인 신수범 선생이 태어난 것도 베이징에서 단칸방을 얻어 살던 시절이었다.

이 여사는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뤼순(旅順) 감옥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보이셨던 강직한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아 있다"며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건강이 악화하자 동료 애국지사들에게 '일본인이 지배하는 땅에 묻히기 싫으니 화장을 해서 물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소개했다.

이 여사는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이신 시어머니 박자혜 여사와 남편이 뤼순으로 면회를 갔는데 시아버지께서 이미 건강이 악화할 대로 악화해 좁은 감옥에 누워만 계셨다고 했다"며 "일본 순사들이 아버님이 유언을 남기는 것을 막으려고 면회를 금지해 돌아가신 뒤에야 시신을 화장해 한국으로 돌아오셨다"고 전했다.

그는 단재 선생의 강직함에 대해 "얼마나 강직하셨던지 일가 중 친일파 거두가 하나 있었던 모양인데 시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니 병보석을 해주겠노라 했던 모양인데 그런 사람에게 내 목숨 구걸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셨다고 한다"고 또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중국에서 생활했던 단재 선생 못지않게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시어머니인 박자혜 여사도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시어머니는 정말 강인했던 분"이라며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산파 일을 하시면서 일제의 갖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가정을 돌보며 독립운동도 지속하셨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나라만 생각했던 애국지사와 그 가족들은 지금도 아무런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서 "시어머니가 남편이 14살이 될 때가지 아버지가 단재 선생이란 사실을 숨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온 애국지사와 후손들보다 중국에 남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여사는 "운암 김성숙 선생의 자손을 비롯해 '김산'으로 알려진 장지락 선생의 자제분들은 모두 중국에서 학자, 정부 관료 등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다"면서 "중국의 이런 점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3대까지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독립유공자 예우법이 제정돼 있지만,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사실상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분들이 더 많다"면서 "이제라도 형평성에 맞게 국가에서 나서서 애국지사와 그 후손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chin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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