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실상 알리기 위해 팔 걷은 군함도 생존자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어렵게 다시 찾은 군함도는 이미 유네스코에 등재됐고 유년시절을 보낸 아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 전국 곳곳을 다니며 생생한 증언을 통해 강제 징용자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는 군함도 생존자가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1939년 입도해 해방 때까지 군함도에서 생활했던 구연철(88·부산) 씨.
구 씨는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년 전에 어렵게 다시 군함도를 찾은 후부터 강제징용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구 씨의 증언에 따르면 경남 양산에서 농사를 짓던 구 씨의 아버지는 일본에 농지를 뺏기자 먹고 살길이 막막해져 모집광부에 자원해 홀로 일본 군함도로 건너갔다.
구 씨는 9살이던 1939년 군함도에 먼저 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할머니, 어머니 등 가족과 함께 입도했다.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군함도는 '지옥의 섬'으로 바뀌어 갔다.
젊은 청년들이 계속해서 군함도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괜찮았던 구 씨 가족의 삶도 나빠져 만주에서 건너오며 상한 콩깻묵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어디선가 끌려온 사람들이 아파트 지하와 5칸 남짓한 수용소를 가득 메웠다.
수용소에서 채찍으로 매를 맞는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비명을 들었고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무인도에서는 시체를 태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연기가 하루에 3차례 이상 올라왔다고 구 씨는 증언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고향을 다시 찾았지만 아버지가 10년 넘게 군함도에서 탄광 노동을 하고 받아온 돈은 고작 180원이었다.
구 씨는 군함도를 다시 한 번 찾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아픈 기억이었지만 가족들의 한이 맺힌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함께 2년전 군함도를 다시 찾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생활했던 주요 공간은 공개가 안 돼 볼 수 없었다.
분노 가득한 마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강제징용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볼 수 있었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시설 등이 오히려 국내에서 찾아보기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구 씨는 이후 서울, 부산 등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생생한 증언을 통해 실상을 알리고 시민단체와 함께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구 씨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 덕분에 강제징용 문제가 조금은 알려졌지만 여전히 관심이 부족하다"며 "시민들이 희생된 분들을 위해 추모할 수 있는 공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부산 남구에 있는 국립강제동원역사관 외에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공간은 전국적으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구 씨는 "강제징용 피해를 본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안 되는 게 현실이다"며 "그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아픔이 이제 막 드러난 만큼 힘이 닿는 한 강제징용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계속 알릴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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