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유관순' 배화여학교 6인, 98년 만에 독립운동 인정받아
보훈처, 제73주년 광복절 포상…여성 26명 대거 포함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 등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서울 배화여학교 재학시절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했다가 붙들린 여학생 6명이 98년 만에 독립운동을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제73주년 광복절(8·15)을 맞아 일제의 감시 속에서 1920년 3·1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6명의 소녀와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등 177명(여성 26명 포함)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93명(애국장 31명·애족장 62명)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8명 등이다.
이들 가운데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배화여학교 재학생이던 6명은 1920년 3월 1일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여학생들은 1년 전의 거족적인 3·1 운동을 재현하기로 치밀하게 사전 준비한 끝에 등교하자마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거의 10대 후반이었으며, 최연소자인 소은명은 16세였다.
보훈처는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시위 재현을 우려해 서울 시내 곳곳에서 경계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어린 여학생들이 과감하게 결행한 만세시위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평가했다.
서간도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도와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여사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1908년 재종조부인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한 후 줄곧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만 6세이던 1915년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16세 때인 1922년 이상룡의 손자인 이병화와 결혼했다.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시댁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보필하면서, 서로군정서 회의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식사를 챙겼으며 독립군들이 입을 군복도 만들었다.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유고', 시부 이준형 선생의 '유서',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등의 자료에서 공적이 확인되어 이번에 포상자에 포함됐다.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1889년 충남 공주에 태어난 여사는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과 결혼했다.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도왔다.
이 여사는 1919년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 귀국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 이회영은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다롄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옥중 순국했다.
아들 이규창이 1935년 3월 상하이에서 친일파 처단에 성공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할 때도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곽영선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3년 애국장을 받은 곽림대 선생의 딸로, 부녀가 독립운동에 헌신해 서훈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이어 평남 순천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명의 여성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최복길, 김경신, 김화자, 옥순영, 이관옥 선생 등은 1919년 평남 순천에서 윤찬복 등과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회원들로부터 의무금 등을 징수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밀사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단체의 주모자로 회계를 맡았던 최복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한 나머지 4명에겐 대통령표창이 각각 추서된다. 보훈처가 발굴한 '조선 소요사건 관계서류'(1921년 일본 육군성) 등의 자료에서 공적이 확인됐다.
이밖에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시인 김영랑(본명 김윤식) 선생에게도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25일 강진군 강진면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대 '독(毒)을 차고', '가야금' 등의 시를 발표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 일제의 갖가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계석노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08년 10월부터 1909년 3월 사이 평북 의주·선천·철산군 일대에서 유상돈의 부하로 의진에 참여해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됐다. 34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2015년 보훈처가 발굴한 '관보'(1910년 6월 20일) 등의 자료에서 순국 사실이 확인되어 포상이 이뤄졌다.
평북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한성호 선생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다. 선생은 1920년 3월 평북 의주에서 조직된 천마산대의 소대장으로 그해 4월 평북 구성에서 현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마산대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단체로, 화승총과 일경으로부터 노획한 총검으로 무장하고 여러 차례 유격전을 벌여 1920년 이후 남만주의 광복군사령부에 흡수될 때까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보훈처는 "이들에 대한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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