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부장판사 "재판거래 의혹사건, 행정처 문건대로 실제 진행"

입력 2018-07-26 18:08
현직 부장판사 "재판거래 의혹사건, 행정처 문건대로 실제 진행"

"강제징용 피해 관련사건, 대법관이 납득 못할 재검토 지시" 회고

행정처 문건엔 외교부 눈치살핀 정황…"대법관 향한 존경심 무너져"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기자 = 양승태 사법부가 재판거래 대상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사는 사건들을 심리할 당시 사건 처리방향을 두고 대법원이 납득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다는 현직 부장판사의 증언이 나왔다.

수도권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이모 부장판사는 26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보상금 청구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이 자신이 내린 판결의 정당성을 같은 사건에서 스스로 부정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검토되고 있었는데도 재판연구관실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2014∼2016년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모든 이상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법원행정처 문건이 속속 발견된다"면서 당시 벌어진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의 이면에 당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보고 문건이 있었다고 지목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했던 피해자 9명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국내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1심과 2심에서는 피해자들이 패소했지만, 대법원은 2012년 원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고법은 개인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대법원의 법리 판단 취지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미쓰비시중공업이 다시 상고해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그동안 소송을 낸 징용 피해자 9명 중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 부장판사는 "미쓰비시중공업 사건 (2012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의견서(판결초고)와 보고서를 주심 대법관에게 보고했는데, 난데없이 수석연구관이 미쓰비시중공업 사건을 다시 파기환송하기로 했으니 판결 이유가 그렇게 (인용해)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판결이유를 수정해야 한다고 보고하러 가자 대법관도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미쓰비시중공업 판결이 이상하고 한일 외교관계에도 큰 파국을 가져오니 사건을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 모든 일이 다른 사건들과 전혀 다르게 연구관실에서 은밀하고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전했다.

재판거래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해 외교부의 '민원' 내지 '요청'이 들어왔다는 언급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건을 확인했다. 문건에는 '판사들의 해외 공관 파견'이나 '고위 법관 외국 방문 시 의전'을 고려해 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주자"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대법원이 외교부에서 법관 외국 파견을 비롯한 편의를 제공받고 나아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상고법원을 얻어내기 위해 사건 처리를 고의로 지연시켰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이 부장판사는 행정처 보고 문건과 관련해 "행정처는 대법원과 분리돼 그 어떤 경우에도 대법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얼마전 대법관들이 성명을 냈다"며 "그 성명은 정의의 최후의 보루인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와 존경을 무너뜨렸다"라고 비판했다.

p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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