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습지, 뭇 생명의 보금자리

입력 2018-08-06 08:01
[연합이매진] 습지, 뭇 생명의 보금자리

그곳에선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만난다



(인제=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찬찬히 바라보면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생동하는 뭇 생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스치는 바람 사이로 생명체의 수런거림과 꿈틀거림이 들린다. 습지에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마음 주머니에 여유 한 줌 담고 습지에 가면 날것 그대로의 자연과 만날 수 있다.

◇ 인제 대암산 용늪…반만년 전 생긴 국내 유일 고층습원

습지는 늪지대, 하천과 연못, 저수지처럼 물기가 있는 축축한 땅을 말한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는 갯벌과 농사를 짓는 논도 포함한다. 지구 지표면의 6%에 불과하지만 습지는 생명의 보고(寶庫)다. 담수 습지에는 전 세계 생물종의 40% 이상, 포유류의 12% 이상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량을 적절히 조절해주고, 지상에 존재하는 탄소의 40% 이상을 저장해 기후를 조절하고, 인과 질소를 제거해 수질을 정화한다. 내륙습지는 홍수를 조절하고, 연안 습지는 기상 변화로부터 육지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급격한 기후변화 속에서 습지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이유다.

연일 불볕이 내리쬐던 지난 7월 중순 우리나라 최초의 람사르습지인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해발 1,304m) 용늪을 찾았다. 용늪은 해발 1천280m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층습원(식물 군락이 발달한 산 위의 습지)으로 약 5천~5천200년 전 형성됐다. 지하수면이 높은 데다 연중 5개월 이상이 영하의 기온이고, 170일 이상 안개가 끼는 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이 고산의 우묵한 지형에 습지가 생겨났다.

대암산에는 큰용늪, 작은용늪, 애기용늪이 있다. 습지 전체의 면적은 1.06㎢이다. 이 중 큰용늪만 탐방이 허용된다. 작은용늪은 지난해까지 군부대 연병장이 있어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고, 애기용늪에는 아직 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통면 소재지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가아리 탐방안내소에서 출입 확인을 받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른다. 경사가 완만한 임도 양옆으로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무성하다. 초록빛 나무 터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길섶에선 주황색이나 흰색으로 피어난 예쁜 꽃도 볼 수 있다. 산길을 20여 분 올랐을 무렵 돌연 차창 밖 사물들의 형체가 흐릿해진다. 길도, 나무도 희뿌연 안개에 포위돼 시계(視界)는 불과 50m도 되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다시 안갯속을 뚫고 엉금엉금 산길을 오르기를 20여 분. 드디어 차 10여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곳 공기는 숨 막히는 폭염이 딴 나라 이야기인 듯 싸늘하다. 점퍼가 필요할 정도다. 감시초소에 걸린 온도계의 눈금은 겨우 영상 10도에 머물러 있다. 오전 10시경 탐방을 예약한 20명이 주차장에 모였다. 용늪 입구 감시초소에서 다시 한 번 신원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탐방에 나섰다.



◇ 신선이라도 나타날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

큰용늪으로 향하는 길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길에서는 멧돼지와 삵의 배설물도 볼 수 있다. 일명 '바람골'이라 불리는 지점에 도착하자 정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김호진 자연환경해설사는 "바람이 강하게 불면 안개가 하늘로 솟구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용늪이란 이름은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김 해설사는 "탐방객들이 산 아래 날씨가 좋으면 희망을 품고 올라왔다가 안개 가득한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것이 용늪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용늪, 해발 1,280m'가 표시된 비석을 지나 신발 털이개에 신발을 털었다. 신발에 묻었을지 모르는 외래종 식물이 용늪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용늪과 람사르습지에 관한 해설사의 설명이 끝나고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됐다.

큰용늪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전망대에 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짙은 안개의 장막에 희미한 초록빛만 스며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인근 펀치볼과 백두대간의 남한 지역 최북단인 향로봉도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평지가 나타나고, 초록색 풀이 무성한 들판 가운데를 가로질러 탐방로가 안갯속으로 이어져 있다. 신선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다.



이곳을 뒤덮은 풀의 정체는 대암사초. 용늪이 람사르습지 1호로 등록될 수 있게 한 식물이다. 원래 동식물은 죽으면 썩고 분해돼 사라져야 하는데 이곳은 춥고 습해서 대암사초가 썩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져 쌓이며 '이탄층'이라는 유기물층을 형성했다. 이곳 이탄층은 1년에 약 1㎜가 쌓이는데 현재 평균 1m, 가장 깊은 곳은 1.8m나 된다. 김호진 해설사는 "용늪은 라텍스처럼 푹신한 이탄층이 있어 빠져도 죽지는 않겠지만, 이탄층은 한 번 밟으면 반경 5m가 무너지기 때문에 데크 밖으로 발을 디디면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삽시간에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초록빛 대암사초가 융단처럼 뒤덮은 맑은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군데군데 물웅덩이도 보인다. 하지만 용늪의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은 10초도 채 되지 않았다.



◇ 희귀·멸종위기 동식물의 천국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다. 노란색 곰취, 자줏빛 꽃창포, 흰색 꿩의다리, 분홍빛 나도제비난 등이 숨은 듯 고개를 내밀어 방문객을 맞는다. 향기로운 하얀 꽃을 피운 개회나무, 약용식물인 당귀, 범꼬리, 사스래나무, 박새도 볼 수 있다.

용늪은 북방계 식물의 남방한계선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이 있다는 뜻이다. 멸종위기종이 많은데 제비를 닮았다는 제비동자꽃, 닻 모양의 닻꽃, 백두산에 많은 날개하늘나리, 여린 모습의 기생꽃 등이 바로 이곳에 있다. 저녁에는 꽃잎을 오므리는 비로용담, 금강초롱꽃, 식충식물인 끈끈이주걱과 개통발도 있다. 하지만 이날 이들 꽃은 볼 수 없었다. 기생꽃은 이미 5월에 피었다 졌고, 제비동자꽃과 날개하늘나리, 닻꽃, 비로용담은 아직 피지 않았다. 용늪에서 가장 많은 꽃을 볼 수 있는 시기는 7월 말~8월 중순까지라고 한다. 9월이면 가을의 한복판에 들어선다.

대암산에는 산양을 비롯해 수리부엉이, 까막딱따구리, 삵, 담비도 서식한다. 봄에는 고라니, 노루, 멧돼지가 용늪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는 모습도 관찰된다고 한다. 꽃이 화려하게 피고 동물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은 역시 여름이다.

3시간 정도 시원한 용늪에 머물다 대암산에서 내려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뙤약볕이 들판을 이글이글 데우고 있었다.



◇ 대암산 용늪 탐방은 어떻게 = 용늪 탐방은 5월 16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예약제로 운영된다. 대암산 용늪-생물자원의 수도 홈페이지(sum.inje.go.kr)에서 2주 전까지, 양구생태식물원 홈페이지(www.yg.eco.kr/plant.php)에서 20일 전까지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 인제에는 서흥리와 가아리 코스가 있다. 하루 3회(오전 9시, 10시, 11시) 출발하는 서흥리 탐방 코스는 대암산 동쪽 서흥리에서 걸어오르는 구간으로 주민감시원이 동반하며 대암산 정상 등반을 포함해 5시간이 걸린다. 남쪽의 가아리 코스는 차량으로 용늪 인근 주차장까지 오른 후 용늪을 탐방하는 것으로 오전 9시 1회만 운영된다. 대암산 정상 등반을 포함해 3시간 정도 걸린다. 양구에서는 오전 10시 차량으로 이동한 후 용늪을 탐방한다. 대암산 정상 등반을 포함해 총 소요 시간은 5시간이다. 탐방 인원은 인제 서흥리 130명, 가아리 20명, 양구 100명으로 제한된다. 인제 서흥리 코스를 이용한다면 숙소를 서흥리 마을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대암산 용늪 자연생태학교로 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서화초등학교 서흥분교 부지에 TV, 냉장고, 에어컨을 갖춘 빌라식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다. 46㎡(14평) 7동, 63㎡(19평) 1동, 82㎡(25평) 1동이 있다. 옛 분교 건물에는 용늪의 형성 과정, 사계절, 동식물 등을 엿볼 수 있는 용늪체험학교가 마련돼 있다.

◇ 주변의 둘러볼 곳

▲ 원대리 자작나무숲 = '나무의 여왕'이라 불리는 자작나무 70만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초록빛 숲 속에서 곧게 뻗은 자작나무의 하얀 자태가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10월 31일까지 개방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산할 수 있다.

▲ 내린천 래프팅 & 카야킹 = 내린천 총 길이 약 70㎞ 중 20㎞가 래프팅과 카야킹 코스로 개발돼 있다. 절경이 빼어나고 수량이 풍부하며 여러 난도의 급류가 있어 가족, 친구들과 시원한 한때를 보낼 수 있다. 이용 가격은 업체, 코스마다 다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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