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는 '휴보 아빠'…자전적 이야기 담았죠"

입력 2018-07-17 08:58
수정 2018-07-17 11:03
"제 아버지는 '휴보 아빠'…자전적 이야기 담았죠"

안시페스티벌서 수상한 에릭 오 감독…오준호 카이스트 교수와 부자지간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진심을 몽환적, 추상적, 초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34·한국명 오수형)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난달 열린 제42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피그:더 댐키퍼 포엠즈'로 TV 프로덕션 부문 최고상을 받았다.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오 감독은 "기존 콘텐츠와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큰 영광"이라며 웃었다. 안시페스티벌은 영화로 치면 칸영화제에 버금갈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애니메이션축제다.



'피그:더 댐키퍼 포엠즈'는 귀여운 돼지와 친구 여우의 이야기를 5분 분량의 에피소드 10편에 담은 작품. 그가 픽사에 있을 때 만든 단편 '댐 키퍼'를 확장한 이야기다. 스트리밍 플랫폼 훌루 재팬을 통해 지난해 9월 처음 공개됐고, 일본 NHK에서 방영됐다.

"주인공 어린 돼지는 죽음을 형상화한 먹구름이 마을을 덮치지 못하도록 풍차로 된 댐을 지키는 일을 해요. 큰 줄기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에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아버지가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어린 돼지가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이 스며들어있죠. 그러면서 자기 안의 공포라든가, 어둠에 직면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그 대목에서 관객들이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아요."

그는 "깊이 있고 시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이지만,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무서운 부분도 있다"며 "웃음이 팡팡 터지는 '병맛 개그'도 담겨있다"고 소개했다.



오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작품에 녹여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인간형 로봇 '휴보'를 만든 '휴보 아빠' 오준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교수다.

평창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12월 휴보는 전 세계 로봇 최초로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섰고, 오 교수가 다음 주자로 휴보로부터 성화를 건네받아 큰 화제를 모았다.

"제가 어렸을 때 대전에 계시던 아버지는 주말에만 서울 집에 오셨죠. 항상 일에 몰두하셨고, 대의를 위해 로봇을 만드시면서 저에게는 '알아서 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열린 마음을 지닌 천재셨고, 그런 아버지에게 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죠. 그래도 제가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로봇공학자이지만, 창작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지금 제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거든요."



성인이 돼서야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오 감독은 30대 중반의 나이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유명 인사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대(UCLA) 영화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졸업 후 2010년부터 6년 반 동안 픽사에서 애니메이터로 몸담았다. '도리를 찾아서'에서 문어 행크 등이 그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다.

픽사는 애니메이션 명가로,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꿈꾸는 꿈의 직장이다. 그는 전 세계 인재들이 모여드는 그곳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인턴으로 들어가 인턴 10명 중 2~3명만 뽑히는 정직원이 됐다.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다.





"픽사 시절, 동료들이 저더러 '분신술을 써서 에릭 오가 집에 가면 5명쯤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그만큼 집중력 있게 빨리 작업을 하는 편이죠. 그것도 모자라 쉬는 시간을 쪼개서 개인 작업을 계속했어요. 남들은 저더러 워커홀릭이라고 불렀지만, 저는 일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픽사에서도 그는 동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잘나가는 애니메이터였다. 애니메이션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애니어워드의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픽사 동료들이 그를 추천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픽사에서 실력과 감각을 키운 것은 물론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고 했다. 오 감독은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려면, 그만큼 많은 협의가 필요하다"면서 "자신을 낮추거나 혹은 내세운 법,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등 균형 잡힌 소통법을 체득한 게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10월 픽사를 떠나 마음 맞는 픽사 동료들이 차린 신생 제작사 톤코하우스로 옮겼다. '댐 키퍼' 시리즈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픽사를 떠난 건 거대 조직의 일부가 아니라 직접 이야기꾼이 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애니메이터로서는 탄탄대로였지만, 제가 픽사에서 감독이 되려면 앞으로 5~10년이 지나도 힘들었을 거에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안주하고 싶지 않았죠."

그는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동양적이고 섬세한 정서를 기반으로 에릭 오 스타일의 이야기와 손맛이 묻어있는 긴 호흡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작업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가상현실, 전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도 관심이 많다. 그의 신작 '무지개 칠하는 법'은 버지니아 현대미술관에서 8월 19일까지 전시 중이며, 현재 그림책도 집필 중이다.

fusion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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