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난민보호소 아시나요…베트남 보트피플 임시 체류

입력 2018-07-08 08:13
부산 난민보호소 아시나요…베트남 보트피플 임시 체류

1975∼1993년 정치망명·경제난민 생활 공간…"제2조국 코리아"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예멘 출신 난민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 지역 여러 나라는 '아프리카 난민 수용'을 둘러싸고 찬반 소용돌이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기치 못한 예민 난민 문제로 시끄럽다.

받아들일 것인지 말 건지를 놓고 여론이 충돌하면서 먼 나라 이야기 같았던 난민 문제가 우리에게도 현안으로 다가왔다.

'난민'이란 말이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는 아니다.

부산에 과거 16년간 베트남 난민보호소가 운영된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베트남전은 1960~1975년 베트남 통일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전쟁이다.

1975년 남베트남은 패망했고 많은 남베트남 주류층이 조국과 고향을 등졌다.

당시 주류층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들 중 1천355명은 메콩강에서 무작정 우리 해군함정에 올랐다.

한 달 후 이들은 우리 해군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항은 맹호부대를 비롯해 국내 수많은 장병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라는 당시 국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으로 떠났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병들이 떠나기 전 눈물의 환송과 이별을 했던 그곳으로 난민들이 들어온 것이다.

당시 반공이 국시였던 한국 정부는 공산화된 조국을 떠난 이들을 위해 부산 서구 대신동 옛 부산여고 자리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줬다.

임시체류지였지만 이렇게 시작된 부산 베트남 난민 역사는 18년을 이어간다.

이들이 도착한 뒤 우리 상선 쌍용호에 의해 구조된 218명의 보트피플이 추가로 임시체류지에 수용됐다.

첫해 임시체류지 수용난민은 1천573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부산 체류는 오래가지 않았다.

584명이 월남참전 국내 연고자 등을 찾아 한국에 정착했고 977명은 남베트남 패망을 동정한 다른 나라의 배려로 새로운 정착지로 떠났다. 정착지를 찾지 못한 난민은 60여 명 정도였다.

1977년 무렵 해상탈출 난민인 보트피플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희생과 논란을 낳았던 보트피플은 당시 전 세계적인 이슈였다.



부산 임시체류지 수용난민이 다시 불어나자 정부와 적십자사는 유엔(UN) 지원 약속을 받고 해운대구 재송동 1008번지에 2천㎡ 규모 난민보호소를 건립했다.

이곳은 현재 고층건물과 고급 백화점이 들어선 센텀시티로 변모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외부와 거의 단절된 군 비행장 담장 넘어 나대지에 불과했던 곳이다.

임시시설이었던 이곳에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 난민이 늘어났다.

초기에는 정치망명을 선택한 난민이 주류를 이루던 것과 달리 1980년대 들어서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경제 난민이 주를 이뤘다.

정치망명 난민 대부분은 외국에 친척 등 연고자들이 있어 체류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경제 난민들은 사정이 달랐다.

1980년대 중반 냉전 체제까지 붕괴하면서 이들을 받아주던 나라도 줄기 시작했다.

해외에 연고자가 없는 경제난민의 경우 길게는 5∼6년 기약 없는 보호소 생활을 이어갔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잔류난민 처리 문제를 두고 여러 의견이 충돌했다.

당시 정착지를 찾지 못한 잔류난민 150여 명은 미국인 사업가 존 매너(당시 신발업체 이사) 씨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뉴질랜드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 정부가 잔류난민의 이민을 수락하면서 18년간 이어진 베트남 난민 부산 생활은 막을 내렸다.

1993년 1월 29일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난민 환송식과 현판 하강식이 열렸다.



장석도 적십자사 부산지사 총무팀장은 1990년도 초 적십자사에 입사해 난민보호소에 의식주를 제공하는 행정처리 업무를 맡았다.

장 팀장은 "해외에 정착할 때까지 집단생활을 하는 베트남 난민들이 불화나 사고 없이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냉전 시대의 산물로 볼 수 있는 부산 난민보호소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한 난민은 환송식에서 이렇게 외쳤다.

"한국 정부와 한국민의 인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적십자 자원봉사자 허영자(75·여) 씨는 1980년대 중반부터 난민보호소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챙겨주는 어머니 역할을 했다.

허 씨는 "1985년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가 우리 선박에 구조된 베트남 난민 부부가 부산 난민보호소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고 몇 년 뒤 방한해 '부산 시민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며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c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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