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오르한 파무크 '빨강머리여인'
오이디푸스 변주한 이야기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 '빨강 머리 여인'(민음사)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작가의 열 번째 장편인 이 소설은 자국인 터키 내에서만 40만 부를 돌파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가장 충격적인 서사로 꼽히는 그리스 신화이자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을 변주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인 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인 줄 모른 채 어머니와 동침해 자식들을 낳은 뒤 결국 진실을 알고 고통받는다. 신탁을 거스르려 애쓰지만 결국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는 여기에 페르시아 고전 '왕서'를 엮었다. 이 이야기는 반대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내용이다. 이 두 이야기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보편적인 애증 관계를 반영한다. 실제로 부자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면서도 두려워하고 견제하거나 미워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많다.
'빨강 머리 여인'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된 한 중년 남자의 회고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화자는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뒤 아버지 부재 속에 성장한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에 큰 허전함을 남겼고 그로 하여금 강한 부성을 지닌 존재를 갈망하게 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우연히 옆집에 우물을 파러 온 기술자 마흐무트 우스타를 만나고 돈을 벌기 위해 그를 따라간다.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왼괴렌이라는 지역에서 우스타와 함께 한 달여간 우물을 파면서 주인공은 우스타를 따르게 되고 점점 그를 아버지로 느끼게 된다. 우스타 역시 그를 신뢰하며 '아들'이라 부르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또 주인공은 그곳의 시내에서 빨강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땡볕 아래서 일을 하는 내내 그녀를 생각하며 가까워질 기회를 노린다.
어쩐 일인지 그녀 역시 그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준다. 그리고 어느 날 단둘이 있게 된 두 사람은 동침하게 된다. 빨강 머리 여인은 30대 중반으로, 주인공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다.
우물을 파는 일은 생각만큼 잘 안 되고, 점점 지친 주인공은 우스타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칠 궁리를 한다. 그러다 예기치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이후 우스타와 있었던 일을 잊으려 애쓰며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학 엔지니어가 된다. 첫사랑인 빨강 머리 여인과 약간 닮은 또래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한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생기지 않고 부부는 자식을 키울 열정을 사업을 키우는 데 쏟는다. 함께 설립한 회사는 승승장구해 주인공은 부자가 되고 회사 광고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알 수 없는 인력에 끌려 다시 왼괴렌을 찾은 주인공은 빨강 머리 여인을 만나고,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에 얽힌 진실을 듣게 된다. 소설은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결말로 끝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오이디푸스와 연결된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파무크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한층 대중친화적인 소설을 썼다. 한국에도 그의 풍부한 서사와 깊이 있는 세계관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다. 이스탄불 빈민가 행상 이야기와 도시화 과정을 그린 전작 '내 마음의 낯섦'은 이런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빨강 머리 여인' 역시 핏줄과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비극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다만, 독자에 따라서는 전작 '내 마음의 낯섦'에 비해 재미와 감동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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