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앞에 드러나는 인간 본성…영화 '킬링디어'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인간의 민낯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상대가 아니면 내가 죽는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 이외에 그 어떤 본능도 작동하기 쉽지 않다. 상대가 설사 내가 가장 아끼는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과학적 신념과 이성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모성애도 때로는 뒷전으로 밀린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영화 '킬링디어'는 등장인물을 극한의 딜레마에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한다. 딜레마는 16살 소년이 복수를 위해 한 가족에 놓은 덫이다. 덫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온 가족을 조여오고,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나머지가 살 수 있다.
성공한 심장외과 전문의 스티븐(콜린 패럴 분)은 그를 찾아오는 소년 마틴(배리 케오건)에게 친절을 베푼다. 고급 시계를 선물하는가 하면, 집으로 초대해 가족에게 소개한다. 스티븐의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와 아들, 딸 역시 마틴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러나 마틴은 점차 스티븐에게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마틴의 정체가 관객에게 드러나는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스티븐의 의료 과실로 숨진 환자의 아들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멀리하려는 스티븐에게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여야 균형이 맞겠죠?"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티븐 가족이 사지마비와 거식증, 눈 출혈 증상을 차례로 보이다가 숨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 아내와 아들, 딸 중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스티븐을 빼고 셋 다 죽는다고 말한다. 반신반의하던 스티븐은 아들과 딸이 차례로 마비증상과 거식증을 보이자 패닉에 빠진다.
딜레마에 빠진 스티븐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냉철한 외과 의사라도 가족의 생사가 달린 일이기에 이성이 마비되고 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죽음 앞에서 각자도생이다. 갑자기 착한 아들, 말 잘 듣는 딸로 바뀐다. 희생자를 골라야 하는 스티븐은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된다. 그가 심장을 수술하는 의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안과의사인 아내는 "남편이 잘못했는데, 왜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반문하면서도, 남편 앞에서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고 속삭인다. 완벽했던 가정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힘들고 불편하다.
그런데도 영화는 연극무대처럼 관객이 한발 떨어져 볼 수 있게 한다.
극중 등장인물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들의 대화는 듣다 보면 코웃음이 날 정도로 소소하면서도 일상적이다. 수술을 끝낸 의사끼리 각자 찬 시계가 몇m까지 방수가 되는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마틴과 스티븐은 진료실에서 겨드랑이털이 얼마나 났는지 묻고 답한다. 마치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이 영화는 그리스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 작품이다. 작품 속 미케네 왕국 왕 아가멤논은 트로이 정벌을 위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으로 바치고, 죽은 줄 안 딸은 피 흘리는 사슴 형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영화 원제는 '신성한 사슴 죽이기(The Killing of a Sacred Deer)'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서 각본상을 받았다.
콜린 패럴, 니콜 키드먼 등 명배우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마틴 역을 맡은 신예 배리 케오건의 섬뜩한 표정이 오래 남는다.
영화는 그러나 기묘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을 보여준 감독의 전작 '더 랍스터'보다 참신함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야기 전개는 느린 편이다. 귀를 찢는 듯한 불협화음 같은 사운드가 긴장과 불안감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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