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우선' 암로당선에 대미관계 적신호…중남미 좌파 '부활'

입력 2018-07-02 10:48
'멕시코 우선' 암로당선에 대미관계 적신호…중남미 좌파 '부활'

암로, 대미관계 재정립 천명…무역·이민·국경장벽 놓고 잦은 충돌 예상

재계 등 기득권층과도 대립할 듯…의회 안정 의석 확보로 개혁 탄력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1일(현지시간) 치러진 멕시코 대선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일명 암로)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멕시코의 대미 관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멕시코 우선주의'를 외쳐온 민족주의 성향의 암로가 무역과 이민, 국경장벽 등의 분야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미 대통령과 사사건건 대립할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암로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미국과 우호 관계를 모색하겠지만, 인종주의적이며 패권주의적인 오만한 태도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기존의 종속적인 대미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재정립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중남미 2위의 경제규모를 보유한 멕시코는 그간 무역, 이민, 마약범죄, 외교 등의 분야에서 미국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멕시코와 미국의 연간 교역액은 6천억 달러를 웃돌며 멕시코 수출의 80%가 미국으로 향한다. 멕시코는 중미 불법 이민자들의 미국행을 최소화하고, 중남미산 마약의 미국 유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베네수엘라 정권에 대한 압박에도 보조를 맞춰왔다.

그러나 트럼프 미 대통령이 취임 이후 국경장벽, 이민, 무역 등의 분야에서 기존 틀을 흔들면서 양국 관계는 경색됐다.

암로는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주 방위군 투입을 명령하는 내용의 대통령 포고령에 서명하자 "장벽이나 무력으로는 사회 문제와 치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5월에는 미국과 접한 국경도시에서 열린 대선 집회에서 "당선된다면 멕시코와 멕시코 국민은 어떤 외국 정부의 피냐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 멕시코가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인형 노릇을 더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피냐타는 중남미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아이들이 파티 때 눈을 가리고 막대기로 쳐서 넘어뜨리는 장난감과 사탕이 가득 든 통이나 인형을 말한다.



암로는 '멕시코의 좌파 트럼프'로 비유되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치적 이념이나 살아온 이력이 다르지만 민족을 우선하는 포퓰리즘 성향이 강하고, 아웃사이더로서 반 기득권을 외치며 거침없는 발언으로 소외 계층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지난해 트럼프 미 대통령의 취임은 간접적으로 암로의 당선을 도왔다. 암로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ㆍ나프타) 개정 협상을 비롯해 이민, 국경장벽 건설 등으로 멕시코를 압박해온 트럼프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멕시코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이었다.

암로는 나프타를 지지하고 있다. 다만 나프타 재협상에서 이민과 임금 문제를 새로 다뤄야 하며 재협상 합의를 대선 이후에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암로는 집권 후 재계 등 기득권층과도 종종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소속 정당인 모레나(MORENA·국가재건운동)당과 노동자당(PT), 사회모임(PES) 등이 상·하원 선거에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한 점도 암로의 개혁 추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관측된다.

암로는 멕시코시티 시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온건한 복지 정책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재계와 우파 정적들은 그를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빗대면서 복지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급진적 인물로 묘사해왔다.

재계는 지난 5월 여러 신문에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2페이지 분량의 광고를 게재할 정도로 암로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재계는 2006년 대선 당시에도 비슷한 광고를 게재해 오브라도르를 반대한 전력이 있다.

암로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정권이 시행한 에너지 산업 개방 등 각종 친시장 개혁이나 민영화 정책을 재검토하거나 철회할 계획이다.

다만, 선거가 임박해질수록 재계의 우려를 의식한 듯 기존 강경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며 유연성을 내비쳤다.

최근 멕시코 최대 통신 재벌인 카를로스 슬림, 최대 병원 체인 알폰소 로모 등 영향력이 큰 사업가와 기업이 속속 암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일부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암로가 재계를 포용하려고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중도적인 경제 노선을 걸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암로가 멕시코 보수 우파의 89년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은 만큼 중남미 좌파 벨트의 부활을 예고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평가도 일각서 나온다.

올해 들어 치러진 코스타리카, 파라과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중남미 각국의 대선에서 좌·우 여당 후보가 정권의 연속성을 이어간 가운데 처음으로 멕시코에서 권력의 무게 중심이 우파에서 좌파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치러질 브라질 대선이 중남미 좌파 벨트의 부활 여부를 가늠하는 최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penpia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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