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위기→극복→현실 안주의 반복"
신간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미국 민주주의를 연구한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1805∼1859)은 미국에서 낡은 증기선을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할 뻔한 뒤 선박을 만드는 사람에게 왜 배를 고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항해술이 나아지기 때문에 지금 상태로도 배가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진보를 향한 믿음과 근시안에 사로잡혀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이 증기선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자가 열정적이면서도 체념적"이라고 비판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펴낸 지 약 200년이 흘렀다. 영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신간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이 생각한 민주주의의 한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로 믿어 의심치 않는 민주주의가 통념과 달리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 중이라는 것이다.
런시먼은 전통적 견해를 존중해 민주주의를 전제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선거,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 개방적 경쟁을 통해 집권이 보장된 사회를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는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부터 기업가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귀결된 2016년 미국 대선까지 100여 년에 걸쳐 민주주의가 어떻게 운영됐는지 들여다본다.
이 기간에 세계에서는 전쟁, 대공황, 냉전, 석유파동,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는 이러한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민주주의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닉슨 정권의 부정과 부패가 드러났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측근이 동독 간첩으로 밝혀져 물러났다. 선진국이라는 일본과 이탈리아에서도 크고 작은 스캔들이 잇따랐다.
2010년대 세계 정치 상황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으로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바다 건너편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의 사학 스캔들로 열도가 떠들썩하다.
저자는 이처럼 자주 나타나는 위기에도 민주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위기, 극복, 현실 안주라는 세 국면이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우월성에 대한 자만, 어쩌다 얻은 승리, 당대의 도전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사람들은 어떤 모욕을 퍼부어도 민주주의 체제가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민주주의가 자만의 덫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규정한다. 현실에 불만을 품고 분노를 표현하지만, 결국 뽑은 인물은 트럼프였다. 저자는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인간적 자질 가운데 가장 나쁜 요소가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리라 느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고 분석한다.
"겉으로는 나라의 장기적 미래를 생각한다고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단기적 선거 전망만을 생각하는 정치인은 조롱받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이다. 모든 민주국가와 민주주의자가 그렇다."
후마니타스. 박광호 옮김. 480쪽. 2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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