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마지막 매듭 풀자"…파로호 수장 중공군 유해발굴 언제쯤

입력 2018-06-26 05:01
수정 2018-06-26 08:46
"냉전 마지막 매듭 풀자"…파로호 수장 중공군 유해발굴 언제쯤



중공군 전사자 2만4천141명·포로 7천905명…수많은 시신 중장비로 수장시켜

美 전사자 유해 68년 만에 송환 속 중공군 유해발굴·위령탑 건립 주장 관심

(화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파로호에 수장된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송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자 냉전체제 마지막 매듭을 푸는 일입니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비핵화와 정전협정 추진 등 평화의 바람이 불면서 6·25전쟁 당시 파로호에 수장된 수많은 중공군 유해를 발굴·송환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 절차가 시작되면서 이 같은 주장이 주목받고 있다.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의 유해발굴·송환 주장은 허장환(70)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허씨는 1988년 12월 6일 서울 여의도 옛 평화민주당사에서 광주사태의 사전 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라는 양심선언을 한 인물이다.

그는 5·18 당시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전남·북 계엄분소 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수사국 국보위 특명단장'이었다.

그런 허씨가 가칭 '6·25전쟁 중공군 유해발굴'과 중공군 전사자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 상생의 탑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은 6·25전쟁 당시 학도병과 공병 장교로 참전한 친형 고 허장원씨 증언이 계기가 됐다.

그의 친형은 허씨에게 6·25전쟁 당시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일대에서 파로호 전투로 전사한 수많은 중공군 시신을 군용 중장비 등을 동원해 파로호에 수장시켰다고 전했다.

허씨는 "형의 증언에 따르면 파로호 전투가 끝난 뒤 산과 들에 흩어진 중공군 시신을 불도저 등 중장비로 실어와 파로호 절벽에 수도 없이 밀어 넣었다"며 "막대한 전사자 시신 처리가 곤란하자 말 그대로 '시신 처리반'이 투입돼 시신을 대거 파로호에 수장한 것인데 이는 제네바 협약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에서 사망한 적이라도 정중히 매장해 분묘로 조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측 전사(戰史)에도 파로호 전투는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긴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지암리·파로호 전투'를 보면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인 1951년 5월 24∼30일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 숫자는 2만4천141명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포로는 7천905명이다.

중공군 3만2천46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고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를 토대로 육군 군사연구소가 작성한 것이다.

6·25전쟁 중 중공군 인명 피해가 사망 11만6천여명, 행방불명 및 포로 2만9천명인 점을 고려하면 지암리·파로호 전투 때 중공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낸 셈이다.

당시 승전보를 전해 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선을 직접 방문,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波虜湖)' 친필 휘호를 내렸다. 당시 작전지도에 파로호는 화천 저수지로 기록돼 있다.



이후 허씨는 정부가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2000년부터 추진된 전사자 유해발굴이 시작된 직후인 그해 8월 파로호 내 중공군 유해발굴을 화천군 등에 제안했다.

그러나 6·25 참전용사 김달육씨와 홍은표 전 화천군수 등이 참여하고 민간단체가 후원한 허씨의 이 제안은 냉전의 틀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다.

허씨는 "중국 측은 치욕적인 패전 역사 때문에 애써 외면했고, 인권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 측도 수많은 전사자를 수장시킨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은 속내 탓에 이 사업은 공전을 거듭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한반도 평화 분위기 속에 파로호 내 중공군 유해발굴도 새로운 의제로 떠오른다.

6·25전쟁 68주년을 맞은 지난 25일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파로호를 다시 찾은 허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그는 "파로호에 수장된 중공군 유해를 이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13억 중국인의 마음을 위로해야 할 때"라며 "아울러 이들의 영혼을 달래줄 위령탑을 건립하는 것이 냉전체제의 마지막 매듭을 푸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50m에 달하는 파로호 수심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퇴적층, 막대한 발굴 비용, 파로호를 근간으로 살아가는 어민들의 생계 등은 유해발굴에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허씨는 "공짜로 하자는 것이 아니고 유해발굴에 대한 막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며 "중국 측으로부터 80억원의 초기 사업비 지원 약속도 제안받은 상태인 만큼 정부 의지만 확고하다면 파로호의 새 역사를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더 나아가 냉전 산물인 155마일 비무장지대(DMZ) 유엔군 전사자 유해발굴과 함께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를 안치해 국제적인 국립묘지로 조성하는 방안도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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