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을 밝혀온 등대의 역사
신간 '등대의 세계사'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오늘날 등대는 소설이나 시 속의 낭만적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문명의 이정표 역할을 해왔다.
지구 곳곳을 탐험하며 식민지를 개척하던 대항해시대와 제국주의 시대 등대는 유럽 열강들에 국가적 사업이었다.
1822년 파리 개선문에서 진행된 새로운 등대 기술인 프레넬 렌즈 실험에는 당시 프랑스 왕인 루이 18세가 신하들을 이끌고 직접 참관했다. 지금으로 치면 우주개발을 위한 우주선 발사와 맞먹는 셈이다.
프랑스 물리학자 오귀스탱 프레넬이 발명한 회전 굴절형 프레넬 렌즈는 등대의 광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림으로써 등대의 역사를 새로 썼다.
프레넬 렌즈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와인을 실어나르는 와인무역 루트를 보호하기 위해 지롱드강 하구에 세운 코르두앙 등대에 최초로 설치됐다.
9세기 무렵 처음 생겼으나 여러 번 무너지고 1611년 새로 지어진 68m 높이의 르네상스풍 건축물인 코르두앙 등대는 화려하고 장엄한 장식으로 조형미에서 극찬을 받는다.
전 세계를 매료시킨 프레넬 렌즈는 각국으로 팔려나갔으며,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지금도 몇 개는 제 기능을 하고 있고 몇 개는 포항 호미곶 등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간 '등대의 세계사'(서해문집 펴냄)는 바다를 헤쳐온 인류 문명사를 등대를 통해서 재조명한다.
저자는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민족학, 고고학 등 융복합 연구를 통해 해양문명사에 천착해온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다. 그는 유럽 전역과 인도양, 북남미, 동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 있는 등대들을 직접 조사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등대는 기원전 3세기 고대 이집트의 계획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파로스 등대다. 파로스 등대는 높이가 고대 건축물로는 믿기 어려운, 오늘날 40층 빌딩과 맞먹는 120~140m로 추정돼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린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도 등장하는 파로스 등대는 14세기까지 보존되다 지진으로 무너졌다. 파로스 등대는 1994년 알렉산드리아 인근 바닷속에서 등대 꼭대기를 장식하던 12t의 화강암으로 만든 이시스 여신상을 비롯한 잔해 수백 점이 인양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문헌 기록상 등대의 역사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7세기 트로이 문명권에서도 흔적이 발견된다. 고대 미노스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로도스 섬 항구에는 기원전 3세기 50m 높이의 아폴론 신을 조각한 청동 거상이 세워졌는데, 밑으로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양쪽 다리를 벌리고 한 손에 불을 든 형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제 기능을 하는 고대 등대도 하나가 있다. 로마 시대인 1세기 에스파냐 북서쪽 라코루냐에 만들어진 55m 높이의 헤라클레스 등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대로, 로마 정복자 카이사르의 대서양 진출을 비롯해 1천900년 동안 이어진 인류의 해양문명사를 웅변한다. 사각형의 다부진 형상에 벽면에 로마 시대 건축가 이름이 새겨진 이 등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입체파 화가 피카소는 에스파냐 남부에서 태어나 라코루냐로 옮겨와 예술학교에 다녔는데, 헤라클레스 등대는 어린 시절 라코루냐 해변을 거닐던 피카소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중세에 세워져 지금까지 작동하는 등대로는 13세기 만들어진 아일랜드 훅 등대와 에스토니아 히우마섬의 코푸 등대, 12세기 세워진 제노바 란테르나 등대 등이 있다.
이탈리아 북서쪽 지중해 해안의 제노바는 한때 베네치아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던 도시다. 란테르나 등대는 대항해시대 개막으로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기 전 중세의 해양력을 상징한다.
제노바는 신대륙 발견으로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출생지다. 콜럼버스의 삼촌은 란테르나 등대의 등대지기였다.
이 밖에도 바이킹의 바다인 북해와 발트해, 대항해의 출발지인 에스파냐 세비야, 포르투갈,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북미와 남미, 중국, 일본, 한국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등대 이야기는 끝이 없다.
등대 조명은 장작불을 펴서 만들던 것이 석탄, 초, 기름으로 연료가 바뀌었으며, 18~19세기 광학 렌즈와 회전 광학기구가 발명되면서 큰 기술적 발전을 이뤘다.
책은 세계 해양문명사를 서구 중심으로 바라보는 주류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한다.
인도양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의 무대였으며 이슬람의 모스크가 등대였다. 중국의 산정 불탑과 일본의 포구 사찰 석등, 제주도의 토착 등탑인 도대불도 등대 역할을 했다.
376쪽. 2만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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