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하필 농번기에"…선거판에 일손 빼앗긴 농촌 울상

입력 2018-06-05 07:07
[르포] "하필 농번기에"…선거판에 일손 빼앗긴 농촌 울상

농촌 고령화로 가뜩이나 손이 부족한데…인력난에 농촌 품삯도 들썩



(전국종합=연합뉴스) "왜 선거를 제일 바쁜 6월에 하는 거여. 몰라, 일단 기다려봐. 지금 바빠 죽겄응게."

전북 김제시 진봉면에서 농사일하던 박종주(62)씨는 부족한 일손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일했는데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불만의 화살은 제7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 돌아갔다.

지난달 31일부터 선거 정국으로 들어서자 농촌 인력이 전부 선거판으로 옮겨갔다.

벼를 발아시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종자를 치고 모판을 논으로 옮겨야 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

박씨는 예년 이 일에 8∼10명의 도움을 받았는데, 올해는 사정사정해 친척 한 명과 함께 하기로 했다.

농촌에서 선거판으로 나간 인원 대부분 청년이다 보니 평소보다 논밭의 고령화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인력사무소에서 일용직 근로자를 고용해보기도 했지만 '농촌 근로 시계'에 맞지 않았다.

일용직 근로자는 오전 9시부터 일을 시작하고 오후 5시가 되면 칼같이 엉덩이를 떼지만, 농촌은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쳇바퀴를 돌아야 한다.

때문에 '왜 선거일을 6월로 정했느냐'는 웃지 못할 핀잔과 하소연이 농촌 지역에 봇물 터졌다.

박씨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만 시의원이 5명 출마했다. 다들 후보와 친척이거나 좁은 지역 사회에서 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일 텐데 '선거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나"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왜 선거일을 농번기로 정한지 모르겠다. 보리를 베고 논도 갈아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여러 명이 할 일을 종일 혼자 하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다"고 토로했다.



복숭아 산지인 충북 음성군과 옥천군 상황도 다르지 않다.

복숭아 품질을 향상하고 병해충을 막으려면 탁구공만 한 크기로 자란 알이 더 굵어지기 전에 봉지를 씌워야 하는데, 농가마다 일손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이 작업은 손이 작고 섬세한 여성에게 적합하다. 그러나 50∼60대 젊은 여성들은 대거 선거판에 동원돼 논밭에는 칠순 넘긴 노인들만 남아있다.

옥천읍 소정리에서 2만㎡의 복숭아 농사를 짓는 장모(52)씨는 "칠순 할머니 손도 귀해져 하루 7만원의 선금을 주고 인력을 확보하는 실정"이라며 "평소에도 일손이 모자라 애를 먹지만, 선거 때면 그 정도가 훨씬 심해진다"고 하소연했다.

옥천군의 경우 이번 선거에 군수 후보 2명과 도의원·군의원 후보 23명이 출마했다.

공직선거법은 군수 후보의 경우 32명, 도의원·군의원 후보는 각각 10명과 8명의 선거사무원을 둘 수 있게 정해놨다.

이 지역 선거판에서 활동하는 인력만 250명을 웃돈다는 얘기다.

선거운동원의 인건비는 하루 7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후보 진영마다 활동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웃돈을 얹어주는 사례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선거운동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힘든 농사보다는 편하고 돈벌이도 낫다"며 "이 때문에 선거철만 되면 농촌 품삯이 덩달아 들썩거린다"고 지적했다.



경북 의성에서 마늘 농사를 하는 심모(78)씨도 매년 마늘 수확기에 인근 안동 등에서 인력을 5∼6명 구해 작업했으나, 올해는 아직 일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

백방으로 일손을 찾고 있지만, 올해는 유독 지방선거와 맞물려 인력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심씨는 결국 올해는 일손 구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오는 16일에 자녀들과 함께 마늘을 수확하기로 했다.

그는 "마늘 조생종의 경우 지금도 수확이 한창인데 선거로 일할 사람이 없다"며 "보통 50∼60대가 작업을 해주면 좋은데 이들이 올해는 선거판으로 빠져나갔는지 일손이 70∼80대밖에 없다"고 했다.

마늘·양파 수확기와 과일 적과 시기에 선거가 치러져 농촌 일손이 부족해지자 경북도는 일손돕기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이달 말까지 과(사업소)나 향우회별로 자율적으로 하루 이상 농촌 일손돕기에 나서도록 했다.

많은 농가가 혜택을 보고 실제 도움이 되도록 농가별로 인원을 4∼5명씩 분산 지원하고 하루 5시간 이상 작업하도록 했다.

포항·김천·상주·경산시, 영양·영덕·청도·성주군 8곳의 각 농촌인력지원센터도 인력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근로자 교육, 차량 임차 등을 돕는다.

이들 센터는 올해 3천690 농가에 4만2천700여 명을 지원해 농가 일손 부담을 덜어줄 방침이다.

(이승형, 황봉규, 박병기, 임채두 기자)

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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