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유산은

입력 2018-05-29 15:50
김기춘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유산은

김덕련 저 '김기춘과 그의 시대' 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곤 한다. 체제 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

1989년 3월 25일자 한겨레는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이 이례적으로 평검사들까지 총장실로 불러 이같이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김기춘은 회고록에서도 '공산주의자'를 '무좀'에 비유하며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으로 돋아날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른바 '무좀론'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전 공직에 발을 들인 김기춘의 50여 년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언론인 출신 김덕련 씨가 쓴 '김기춘과 그의 시대'(오월의봄 펴냄)는 권력 중심부를 향해 쉼없이 전진하면서 극우반공 외길을 걸은 김기춘의 삶을 복기한다.

책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초임검사 김기춘의 1967년도 석사 논문을 유심히 살핀다. 그는 악용될 가능성이 큰 보안처분을 도리어 사회의 '새 무기'로 바라봤다. 몇 년 후 김기춘이 관여한 유신헌법은 보안처분을 규정한 최초의 헌법이 됐다.

유신헌법 제작 공로로 김기춘은 중정으로 발을 넓히며 첫 번째 전성시대를 맞았다. 당시 중정 법률보좌관이던 김기춘이 정권 차원에서 조작한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김기춘이 8·15 저격범 문세광의 입을 열게 했다는 '영웅담' 또한 사료를 살펴볼 때 근거가 불확실하다.

중정 대공수사국장이 된 김기춘은 고문으로 조작한 학원 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을 터뜨리는 등 유신독재 수호에 팔을 걷어붙였다. 책은 김기춘 외에도 김황식, 양승태 등이 조작 간첩 제조 사건에 관여했음에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비판한다.



김기춘도 위기에 몰릴 때가 있었다. 보안사를 몰아친 전력 때문에 5공 시절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러나 '5공 피해자'처럼 규정된 김기춘의 진짜 모습은 "허화평에게 충성맹세 편지까지 쓴 김 부장"(박철언 회고록)에 더 가깝다. 극우반공 사회를 바랐다는 점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와 김기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김기춘은 이후 검찰총장으로 발탁, 변죽만 울린 5공 비리 수사와 공안정국 조성을 주도했다. 그 결과 검찰은 김기춘 지휘 아래 정권 수호 선봉장으로 굳어졌다는 게 책의 평가다.

1992년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으로 제 무덤을 판 김기춘은 '야구'를 징검다리 삼아(KBO 총재) 다시 권력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국회의원을 거쳐 권력 최고 정점에 이른 김기춘은 결국 국정농단 사건으로 몰락했다.

책 앞부분에는 김기춘이 1993년 대학 시절을 반추하며 쓴 '서울법대 교정은 정의와 인간애의 도량' 원고가 실려 있다. "법조인들은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다룬다. (중략) 잘못된 법 해석과 수사, 재판으로 억울하게 죄를 씌워 선량한 국민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김기춘이 직접 쓴 글이 맞는지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구속된 김기춘의 삶과 그를 둘러싼 현대사를 지금 다시 돌아봐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김기춘 '무좀론'이 현대사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다른 김기춘들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424쪽. 1만9천500원.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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