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가 죽어간다"…트럼프 탓에 분쟁조정 기능 마비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기자 = "세계무역기구(WTO)가 서서히 목 졸려 죽어가고 있다."
리카르도 라미레스-에르난데스 WTO 상소기구 전 위원이 28일 WTO 본부에서 열린 고별식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WTO의 주요 기능인 분쟁조정이 미국 때문에 마비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꼬집은 것이다.
라미레스-에르난데스 위원은 멕시코 출신의 통상법 전문가로, WTO 상소기구 위원을 2회 연임한 뒤 지난해 12월 퇴임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상소기구가 "마비되기 직전에 있다"면서 "이 기구가 질식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밝혔다.
지난 1995년 창설된 WTO는 국제무역 관련 사안을 논의하는 글로벌 포럼이자 회원국 사이에 벌어지는 무역분쟁을 강제 조정하는 역할도 수행해왔다. 상소기구는 무역분쟁을 강제 조정하는 최종심(2심)에 해당한다.
상소기구는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선임하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위원들은 국제 통상 분야에서 최고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 불공정한 판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임기 만료로 떠나는 일부 상소기구 위원의 자리를 메우는 절차의 진행을 거부한 탓에 현재 3명이 공석인 상태다.
남아 있는 4명 가운데 1명은 오는 9월 관례대로 연임에 들어가지만 2차 임기를 수행 중인 다른 2명은 내년에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게 된다. 분쟁 조정은 통상 3명의 위원이 필요해 이대로 간다면 내년에는 상소기구의 기능이 아예 멈추게 된다.
라미레스-에르난데스 전 위원은 연설에서 이런 사태를 부른 미국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모든 WTO 회원국들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WTO의 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뤄진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는 위기의 원인을 한 회원국에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회원국들이 건설적 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해 타협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고별식에 참석한 카를 브라우너 WTO 사무차장은 사태를 풀기 위한 "아무런 가시적 움직임이 없다"면서 "이는 끔찍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브라우너 사무차장은 WTO가 상소기구의 위원들이 없이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착각"이라며 "WTO가 문명의 성취인지, 아니면 일시적 실험인지 두고 봐야 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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