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다…소설 '새의 시선'
정찬 여덟번 째 소설집…김세진 이재호 분신·용산참사·세월호 다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두 사람은 불이 붙은 상태로 구호를 외쳤습니다. 저는 불이 붙은 상태에서도 저렇게 오래 생명이 붙어 있구나,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고, 사람이 불에 탄다면 그 온도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뜨거울까,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두 사람이 굉장히 오랫동안 구호를 외쳤던 생각이 납니다.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 ('새의 시선' 52쪽)
소설가 정찬(65)의 새 소설집 '새의 시선'(문학과지성사)은 시대의 비극 속에 아프게 스러져 간 영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사건들이지만, 그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한 고통과 부채의식을 안긴다.
단편 7편이 담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인 '새의 시선'이다. 이 소설은 1986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과 2009년 용산참사를 연결시킨 이야기다.
소설은 사진작가였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신 근육 마비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박민우'를 정신과 의사인 화자가 만나 상담을 하면서 시작된다. 박민우는 화자에게 한 다큐멘터리 영화 DVD를 건네는데, 이 영화는 1986년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의 진압에 저항해 분신하며 숨진 김세진·이재호에 관해 주변 인물들의 기억을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박민우가 이 영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본인의 끔찍한 경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데, 소설 화자는 장례식장에서 그의 친구로부터 두 사람이 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박민우는 경찰특공대인 친구의 부탁으로 당시 현장 채증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불이 난 망루까지 올라갔다.
이 소설 속에서 1986년과 2009년의 두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런 비극이 있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무관심하고 세상이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는 것이다.
"학교에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고,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을 했다고 씌어져 있었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대자보를 보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고, 또 언제나 그랬듯이 강의하러 가는 교수들의 무표정한 얼굴도 보였고,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도 보였고, 그 모든 상황들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평온…" (53쪽)
"그런데 어젠 아무도 없었어. 장례식을 치렀거든. 장례식을 치른 날,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수백 개의 만장이 새의 날개처럼 나부꼈어. (중략) 장례식이 끝나자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남일당이 처음으로 텅 비게 된 거지. 난 적막한 남일당 속으로 가만히 들어갔어." (74쪽)
"과거에 갇히면 현재의 시간이 의미를 가질 수 없"지만, "과거는 현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생명체"(50쪽)라는 박민우의 말은 우리가 과거와 역사를 어떻게 돌아봐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제25회 오영수문학상과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다른 수록작인 '사라지는 것들'과 '새들의 길', '등불'은 세월호 참사를 다뤘다.
'사라지는 것들'은 소설가인 주인공이 죽은 옛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와중에 그의 딸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이야기다. 재능있는 화가였던 친구는 1986년 한 광부의 절망적인 얼굴을 그렸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폐인처럼 살다 죽었다.
'새들의 길'은 세월호 참사로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다.
"종우야 가거라.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엄마도 잊어라. 엄마를 잊지 않으면 죄 많은 땅도 잊지 못할 테니.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마라. (중략) 네가 머나먼 여행을 하는 동안 엄마는 죄 많은 땅을, 너를 사라지게 한 죄의 진창 속을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너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움의 힘으로 너의 없음을 땅과 하늘 사이에서 쉼 없이 외칠 것이다." (140쪽)
문학평론가 이소연은 "정찬은 인간성과 신성을 구성하는 두 축인 '윤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깊은 예술혼과 탐색의 열정으로 이들을 혼융시킨다. 그러다 보면 윤리와 미학의 불가능성을 동시에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정찬의 소설은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고, 삶의 진실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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