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 무산] 회담 성사부터 파국까지 '77일간의 줄다리기'
트럼프, 3월초 김정은 회담의사 즉석 수락으로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 물꼬
폼페이오 두차례 방북·북 억류 미국인 3인 귀환에 회담 분위기 무르익어
펜스·볼턴 '비핵화 원칙론' 강조에 北 '회담 취소' 엄포놓으며 반발
백악관 "펜스 부통령에 대한 北 반응이 인내의 한계였다"
트럼프, 北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3시간 후 회담 취소 전격 발표
(워싱턴=연합뉴스) 이승우 특파원 = 사상 초유의 북미정상회담이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해놓은 상태에서 불과 20일을 남기고 무산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지난 3월 8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방북 특사단이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비핵화와 회담 의사를 전하고, 이를 트럼프 대통령이 즉석에서 전격 수락하면서 회담이 사실상 성사된 지 77일 만의 파국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수락 발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메가톤급 뉴스였고, 역사상 최초로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 간 직접 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의 해결이라는 숙원이 풀리는 게 아니냐는 기대를 키웠다.
연초까지만 해도 북미 정상이 '핵 단추 경쟁'을 벌이는 등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말의 전쟁'을 벌여온 것을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5월까지 만나겠다"며 '속전속결'의 의지까지 보여 회담 개최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게 사실이다.
북미정상회담 추진은 또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맞물려 대결 국면이던 한반도 전체를 화해의 분위기로 일순 바꿔놓았다.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더욱 굳어진 것은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이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부활절 주말(3월31일~4월1일) 극비리에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나고 오면서부터다.
폼페이오 장관은 한국의 방북 특사단으로부터 전해 들은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향을 직접 확인했다는 긍정적 소식을 전했었다.
이 사실이 언론보도로 뒤늦게 알려진 지난달 17일을 전후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지난달 9일 각료회의에서 처음으로 "5월 말 또는 6월 초 만날 것"이라며 회담 시점을 처음 밝힌 이후 "회담의 세계적 성공",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 "회담이 아주 멋질 것"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심지어 지난달 24일 열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작년까지 '꼬마 로켓맨'으로 불렀던 김 위원장에 대해 "매우 많이 열려 있고 훌륭하다"는 호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 회담 확정을 위한 북미 간 실무 협상은 급속히 진전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5일 이틀 연속 회담 날짜와 장소가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회담 발표가 계속 늦어지면서 다시 회담 확정 협상이 난항을 겪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사이 김 위원장이 극비리에 두 번째 중국을 방문(5월 7~8일)해 '단계적 비핵화' 해법을 재확인하자 미국 정부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같은 난기류는 '대북 전령사'로 떠오른 폼페이오 장관의 2차 방북(5월 8~9일)이 이뤄지면서 말끔히 해소됐다. 특히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은 회담 의제 조율과 동시에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 3명을 송환해오는 '선물'을 받아오는 것이어서 회담 성사 분위기를 더욱 띄웠다.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인 억류자 귀국 당일인 10일 곧바로 회담 날짜와 장소를 6월 12일 싱가포르로 발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틀 뒤인 12일엔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 방식으로 폐쇄하겠다고 발표했고,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똑똑하고 정중한 몸짓"이라고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회담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3일 '안보 사령탑'인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언론인터뷰를 통해 북한이 폐기한 핵·미사일 장비와 물질을 미국(테네시주 오크리지)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분위기가 다시 급변했다.
북한이 이를 일괄타결 비핵화의 대표적 사례인 '리비아 모델'로 받아들이고 볼턴 보좌관을 비난하면서 북미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거론하고,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문제 삼아 예정된 남북고위급 회담을 전격 취소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 다시 북미정상회담 무산설이 돌기 시작한 가운데 볼턴 보좌관은 17일에도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을 재확인하고 북한의 엄포에 대해서도 "새로운 게 없다"고 일축했다.
미국 의회에서도 야당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북미정상회담 회의론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전략에 휘말려 섣부른 합의를 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도 침묵을 깨고 불편한 심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17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과 면담에서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내놓으며 최후통첩성 경고를 던졌다.
'당근'은 회담장에 나와 비핵화에 합의하면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을 부유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고, '채찍'은 회담을 거부할 경우 리비아를 '초토화(decimation)'했던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겠다는 경고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같은 자리에서 북한의 회담 취소 엄포와 관련, '시진핑 배후론'을 내놓으며 '좋은 친구'라고 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결국 이 같은 최후통첩에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나온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발언과 이에 대한 북한 측의 비난은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펜스 부통령은 22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어떠한 양보도 하기 전에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의 '복귀 불가능 지점(no point of return)'에 도달하는 것을 봐야 한다"며 '선(先) 핵폐기-후(後) 보상'으로 해석되는 언급을 했다.
이에 대해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담화를 내고 펜스 부통령을 향해 '횡설수설' '무지몽매한 소리'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등의 원색적 비난을 쏟아내면서 정상회담 '재검토'를 거론했었다.
이와 관련해 백악관 관계자는 24일 로이터 통신에 "펜스 부통령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인내의 한계'였으며 정상회담을 취소하도록 했다"면서 "북한이 기꺼이 통과하고자 한다면 여전히 열려 있는 뒷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그들의 수사 방식을 바꾸는 것과 관련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발표는 한미정상회담이 열린 지 이틀 만에,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가 진행된 지 약 3시간 만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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