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시인' 김환기
대구미술관 회고전…평면 108점·아카이브 100점 등 최대 규모
전체 작품가 1천억 추산…'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연작 등 출품
(대구=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1970년 1월 27일 미국 뉴욕 작업실에서 새해를 맞은 57세 김환기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차 브라질을 찾았다가, 꿈을 안고 미국으로 곧장 건너간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김환기는 고국산천과 그곳에 남겨둔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 예술을 향한 열망을 담아 거대한 면포에 푸른 색점을 찍고 또 찍었다. 이미 색점을 찍은 자리에 예닐곱 번을 더 찍고, 일일이 네모꼴로 그 색점들을 감싸 안았다. 작가는 이렇게 수만 개 점으로 채운 그림에 늘 외우던 김광섭 시 '저녁'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붙였다.
현대미술 걸작으로 꼽히는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을 받으며 국내 화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대가였던 김환기가 새 시대, 절정을 맞았음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22일 대구미술관에서 개막한 '김환기' 전은 통상적인 회고전이면서 "김환기 작업 정수로 꼽히는 전면점화가 나오기까지 그 여정을 천천히 살펴보는"(유은경 학예연구사) 자리다.
'김환기' 전은 ▲ 1933~37년 도쿄시대·1937~1956년 서울시대 ▲ 1956~1959년 파리 시대·1956~1963년 서울시대 ▲ 1963~1974년 뉴욕 시대로 시간순으로 작품을 배열했다.
전시를 여는 자그마한 '집'은 전남 신안군 작은 섬에서 나고 자란 김환기가 일본에서 서구 전위미술을 익히던 시절인 1936년 작품이다. 샛노란 바탕에 계단과 문, 항아리 등을 간결하게 담아낸 작품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 추상화 '론도'(1938) 탄생을 예감케 한다.
발걸음을 점차 옮길수록 도자기, 매화, 구름, 학, 산과 달 등 우리 자연과 전통 기물을 추상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려 한 시도가 엿보인다. 매화가 꽂힌 항아리 옆에 서정주 시를 적은 '항아리와 시'(1954)는 올해 3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구상 중 최고가(39억3천만 원)를 기록한 작품으로 개인 소장품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인 '영원한 노래'(1957)는 항아리부터 달까지 작가가 평생 애정한 모든 대상을 망라한 반추상 작품이다. 파리에 머무르던 당시 김환기는 영원을 상징하는 십장생을 즐겨 그렸다. 작가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섬의 달밤'(1959)처럼 자연 풍경을 한결 간결하게 표현한 두터운 질감의 푸른 반추상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전시 절정은 가장 깊숙한 곳, 별도 공간에 모인 뉴욕 시절 푸른 전면점화 5점이다. 화폭마다 쏟아내는 별무리는 보는 이의 마음에 자연히 파문을 일으킨다. 서양 재료인 유화 물감을 썼지만 캔버스천이 아닌 광목을 바탕으로 했기에 번짐과 스밈, 농담이 자연히 드러난다.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다.
이 가운데 중앙 벽을 차지한 '10-VIII-70 #185'는 한국미술대상전 수상작과 같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로, 최대 규모다.
공간 바깥에 늘어선 12점 작품은 종이에 펜과 색연필, 과슈 등으로 연습한 흔적을 담았다.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면점화를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전면점화 못지않게 눈길이 간다. 붉은색 점화 '1-Ⅷ-70 3 185'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됐다.
전시장에서 감상하는 김환기 작업의 쉼없는 변화는 김환기가 왜 가장 '비싼' 미술가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또한 "김환기가 특별한 것은 대부분 우리 미술가들이 일단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면 그 후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비슷한 작품을 되풀이 제작하는 데 비해, 김환기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말년에는 그 노력과 재능이 완전히 만개하면서 빛을 발한 화가이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2012년 갤러리현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 회고전, 2013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광주시립미술관 '김환기, 백년되어 고향에 돌아오다', 환기미술관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 전을 잇는 대규모 전시다.
시대별 작품 108점에 연표와 사진, 도록, 서적, 표지화, 소품, 화구, 영상 등 아카이브 100여 점까지 더하면 역대 김환기 전시 중 최대 규모다.
당장 27일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붉은점화 ''3-II-72 #220' 한 점이 100억 원 기록을 쓸지 주목받는 상황에서 대구미술관 전시 출품작 작품가만 1천억 원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이날 현장에서 나왔다. 그나마 낮춰잡은 보험가액도 480억 원 수준이다.
지난해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예정된 김환기 회고전 무산으로 아쉬웠던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될 전시다.
최승훈 대구미술관 관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해외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시려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라면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김환기 전시 외에(이번 전시로) 더 많은 이야기가 생겼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전시는 8월 19일까지.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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