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해묵은 이념 논쟁에 또 불붙인 새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
(서울=연합뉴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해묵은 이념 논쟁이 또 한차례 뜨겁게 전개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2020년부터 사용될 중·고교생용 새 역사교과서를 만들 때 적용할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 기준 시안(試案)'을 2일 공개했다.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해 제출받은 시안을 보면,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란 기존 표현이 새 집필 기준에서는 빠졌다. 6·25전쟁 서술과 관련해 그간 논란이 됐던 '(북한의) 남침' 표현은 집필 기준이 아닌 교육과정에 추가됐다. 시안은 또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편찬 당시 추진됐다 무산된 '대한민국 수립'(1948년 8월 15일) 표현은 현재 교과서 표현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진보적 역사관이 많이 담긴 것으로 평가되는 이번 시안은 현재 중고생들이 쓰는 역사교과서의 집필 기준과 다른 내용이 많다. 따라서 앞으로 교육과정심의회의 심의·자문과 행정예고를 거쳐 7월 초 최종 고시에 이르기까지 진보·보수 진영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는 앞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지난해 5월 말 폐기했다. 대신 기존 검정 방식으로 새 교과서를 만들어 올해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토록 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일정이 너무 촉박해 보급을 2년 미뤘다.
새 집필 기준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란 표현을 뺀 것과 관련, 시안 연구진은 1948년 유엔(UN) 결의에는 대한민국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정부'라고 돼 있고, 남북한이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므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란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면 보수진영은 유엔 결의 일부 구절과 전체적 맥락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맞선다. 6·25전쟁에서 '남침'이란 표현을 집필 기준이 아닌 상위개념의 교육과정에 넣은 것을 놓고, 보수진영에서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한 '남침 유도설'을 반영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교육부 관계자는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란 것은 학계의 정설"이라며 "집필 기준에 쓰여있지 않다는 것이 교과서에 '남침 유도설'을 서술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나머지 주요 사안도 정치적 논란거리이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 수정이 반복됐다는 점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정치권을 중심으로 역사교사서 개편 논의가 일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보수적 역사관이 담긴 국정 한국사 교과서 체제를 진보적 시각을 담을 수 있는 검정 체제로 전환했다. 후임 이명박 정부는 새 집필 기준을 만들어 교과서 내용 반전을 시도했다. 박근혜 정부는 좌 편향의 검정교과서를 바로잡는다며 국정화 체제로 되돌리려다 탄핵으로 실패했다. 역사적 사실도 시대변화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전문학자들의 주도 아래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정치의 입김으로 역사 내용이 바뀌면 불신과 갈등만 초래된다. 따라서 학계와 교육계 전문가들이 최종 고시까지 남은 시간 충분한 토의를 벌여 올바른 결론을 내 불필요한 사회 갈등을 막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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