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색 벗은 오페라 '투란도트'…디스토피아 설정
서울시오페라단의 현대적 해석…미래세계와 안 어울리는 의상·안무는 아쉬워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오페라극장으로 지어지지 않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페라를 올리는 일은 항상 다양한 난제를 동반한다. 음악적, 음향적 어려움도 크지만, 연출가와 무대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무엇으로 이 드넓은 무대를 채울까가 우선적인 고민이다. 27일 공연으로 본 서울시오페라단(단장 이경재)의 '투란도트'는 일단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연출가 장수동과 무대디자이너 오윤균은 영상을 적절히 조합한 무대와 출연진의 부단한 움직임을 통해 넓고 높은 무대를 효율적으로 채웠다.
'레지테아터'('연출가 중심의 극'이란 뜻의 독일어·연출가가 원작의 시대와 배경을 바꾸거나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삽입) 방식의 오페라가 유럽에서 대세로 자리 잡은 지는 이미 30년이 넘었고, 국내에서도 최근 몇 년간 연출가들이 꾸준히 이런 시도를 해왔다. 특히 국내 레지테아터 오페라의 선구적 연출가인 장수동은 이제까지 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연출돼온 '투란도트'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전설적인 시대의 중국을 배경으로 투란도트 공주와 칼라프 왕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오페라를 한국의 당인리발전소(현 서울복합화력발전소)를 모티프로 재해석했다.
2003년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테디베어 투란도트'(투란도트 공주를 심리적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적 성장이 멈춘 여주인공으로 표현)나 2017년 스테파노 포다의 초현실주의적 투란도트처럼 중국색을 벗어난 투란도트를 국내에서는 처음 선보인 셈이다.
환경파괴에 따른 기후재앙으로 세상이 얼어붙고 문명이 붕괴해 산업혁명기 기술 수준으로 돌아간 지구.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하는 이 디스토피아의 설정 속에서 모든 것을 잃은 칼라프 왕자와 권력을 지닌 투란도트 공주가 만난다. 기발하고 설득력 있는 아이디어인 데다 화력발전소 내부를 무대 세트로 옮긴 것도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무대 위 인물들이 마치 컴퓨터게임 캐릭터들처럼 보여 몰입도가 높았다는 관객들의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디테일에 있어서는 아쉬움도 남았다. 기술적으로는 퇴보했다고 하지만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만큼, 의상과 안무도 확실하게 미래주의적이었더라면 더욱 강렬한 효과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배경 설정이 파격적으로 바뀌면 등장인물들의 개성이나 움직임도 그에 걸맞게 역동적으로 변화했어야 하는데,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관계 및 상호작용이 기존의 전통적 연출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은 점은 아쉽다.
25개 푸른 라이트가 창살 형태로 쏟아지고 투란도트의 두 눈이 영상으로 클로즈업되는 수수께끼 장면, 계단 위 난간에 선 인물들의 아름다운 실루엣 등 전반적으로 조명과 영상의 조화와 효과가 뛰어났다. 수수께끼의 답을 붉은 전광판 글씨로 보여준 것은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아이디어였다.
성남시립교향악단을 이끈 지휘자 최희준은 '투란도트'의 현대적 화성과 압도적인 총주부를 매력 있게 살렸고 푸치니 특유의 유장함도 여유롭게 표현했다. 성악을 배려해 오케스트라의 밸런스도 적절하게 조절했다. 다만 관악기들의 잦은 실수와 다소 건조한 울림은 아쉬웠다.
소프라노 김라희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고음으로 대규모 오케스트라 총주 및 합창을 뚫고 소리를 명징하게 전달하는 탁월한 투란도트였다. 완성도 높은 아리아 '이 황궁에서'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중저음도 안정적이었다. 테너 박지응은 풍부한 음량으로 압도적인 칼라프를 들려주었고 필요한 부분에서는 서정적인 표현력도 돋보였다. 다만 호흡이 충분히 여유롭지 않아 아쉬웠다. 소프라노 신은혜는 맑은 고음, 호소력 있는 음색, 감성적인 연기력을 갖춘 이상적인 류였다.
다른 조역 가수들 및 합창단과 더불어 핑, 팡, 퐁 세 사람의 조화로운 가창과 연기가 극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었다. 일상어로 자연스럽게 번역한 자막, 작품과 공연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알찬 내용의 프로그램북도 훌륭했다. 소프라노 이화영, 테너 한윤석, 소프라노 서선영이 위의 주역들과 번갈아 출연하며 공연은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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