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점자책 1권 제작 수개월…향학열 꺾이는 시각장애인
개인이 책 만들며 대학 공부…사회적 지원체계 마련 시급
(울산=연합뉴스) 김용태 기자 = "대학 전공 도서 한 권이 점자책으로 제작되려면 3개월이 넘게 걸립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원하는 공부를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요."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 가운데 수험서나 대학 교재 등 전문 분야의 책이 매우 부족하고,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미래를 위해 학업에 매진하려는 청소년과 대학생 시각장애인들의 향학열이 꺾이고 있다.
20일 울산점자도서관과 국립장애인도서관 등에 따르면 수능 문제집이나 참고서, 대학과 대학원 교재 등 전문 서적은 시각장애인용으로 제작된 것이 소설이나 교양서적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울산점자도서관이 소장한 점자책은 1만5천권에 달하지만 전문서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울산점자도서관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선별해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는 점자책이나 들을 수 있는 녹음 도서, 전자 도서 등으로 제작하고 있다.
한 달에 30권 정도를 꾸준히 배포하지만, 누구나 폭넓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나 에세이, 교양서적이 대부분이다.
수험서나 대학 전공 도서 등 전문 서적류는 이용하는 사람이 한정돼 있다는 이유로 개인 주문 제작형태로 점자책이 만들어진다.
특히 전문 서적류는 소설류보다 내용이 어렵고, 책에 삽입된 표나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므로 제작 기간도 훨씬 오래 걸린다.
한 권을 만드는 데 최대 3∼4개월이 소요되기도 한다.
출간된 종이책의 내용을 자원봉사자가 일일이 다시 컴퓨터로 타이핑해 문서 파일로 만드는 지난한 작업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최근 들어 점자책 대신 전자도서를 선호하고 있다.
전자 도서는 문서 파일을 소프트웨어에 적용해 디지털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이용한다.
또 이 파일은 점자로 변환해 출력과 제본을 거쳐 점자책으로도 만들어진다.
출판사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도서 파일을 점자도서관에 제공한다면, 종이책을 파일화하는 작업이 생략돼 제작 기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의무조항이 아닐뿐더러 사전 유출 등으로 인해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출판사는 파일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점자책이나 전자도서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없으면 만들기 어렵다는 점도 시각장애인의 공부 의욕을 무너뜨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입 준비나 대학공부를 하려는 시각장애인들은 자원봉사자가 모집되고 이들이 책 제작에 도움을 주기까지 몇 개월씩 그저 기다려야 한다.
더군다나 대학에 다니는 시각장애인들은 3월에 학기가 시작되어서야 자신이 공부해야 할 전공 교재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제야 점자책이나 전자도서 제작을 신청해야 하므로 몇 개월간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점자도서관은 이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려고 전공 교재 앞부분 일부라도 점자책으로 만들어 시험 기간 전에 제공하고는 있으나 제대로 공부하기는 어렵다.
울산점자도서관 관계자는 "법학전문대학원을 다니는 한 시각장애인이 학업에 필요한 법률 도서들을 얻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점자도서관에 한 권씩 제작을 의뢰한 사례도 있었다"며 "시각장애인들은 원하는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예전엔 주로 복지 분야에 종사했던 시각장애인들이 최근엔 법률이나 컴퓨터, 음악, 예술 분야로도 진로를 넓혀가면서 제작 의뢰하는 도서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으나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적 여건은 여의치 않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는 시각장애인들이 개강 전 책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교육부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사전 수강신청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점자책 제작 기간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점차 이뤄지는 것도 희소식이다.
지난해 11월 행정안전부와 온라인 도서 유통회사인 예스24, 국립장애인도서관 등 여러 기관·단체가 '시각장애인 독서활동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예스24가 보유한 각종 전자책 콘텐츠를 점자책 제작에 한해 활용할 수 있게 돼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이핑 작업을 건너뛸 수 있다.
국립장애인도서관 관계자는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책이 있는 경우 예스24에 신청하면 간단한 작업을 통해 점자책으로 제작해 보내주는데, 이르면 다음 달부터 시행될 전망"이라며 "다만, 전자 도서의 경우 출판사들이 여전히 파일을 전송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어 제외됐다"고 말했다.
yongta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