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혁 한-아세안센터 신임 사무총장 "동반자적 인식이 중요"
베트남·필리핀 대사 지낸 아시아통…"신남방정책 추진으로 어깨 무거워"
2009년 센터 준비기획단서 일해…"마음 이어주는 문화·인적교류에 주력"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한국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대국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신(新)남방정책을 발표하며 상품교역 중심이던 관계에서 기술·문화예술·인적교류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에 따라 2009년 출범 이후 한국-아세안의 교역 증대, 투자 촉진, 문화 관광 협력 확대, 인적교류 활성화 등의 도우미 기능을 해온 한-아세안센터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면서 16일 취임한 이혁(60) 신임 사무총장의 활약에도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그는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중이던 1979년 5월 21세의 나이로 외무고시(13회)에 합격해 이듬해 직업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동북아1과장, 중국 참사관, 아시아태평양국장, 일본 공사, 기획조정실장, 필리핀 대사, 베트남 대사 등을 역임하고 청와대 외교비서관을 지내 외교부의 핵심 브레인이자 대표적인 '아시아통'으로 꼽힌다. 더욱이 한-아세안센터 준비기획단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어 자신이 설립의 기초를 닦는 데 한몫했던 국제기구에 수장으로 돌아와 새로운 도약을 이끌게 됐다.
지난 2월 26일 한-아세안센터 정기이사회에서 임기 3년의 제4대 사무총장으로 선임된 이 총장은 3월 12일 김영선 3대 사무총장의 임기가 끝난 뒤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방문 등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한 달여 늦게 지각 부임했다.
15일 베트남에서 귀국해 16일 한-아세안센터로 처음 출근한 그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프레센터 8층 집무실에서 만나 취임 소감과 앞으로의 포부, 아세안의 가치와 한국과의 관계 전망 등을 물어보았다.
그는 업무 파악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도 아세안 전문가답게 자료를 보지도 않고 구체적 사례와 관련 수치 등을 들어가며 자신감 있는 어조로 대답했으며 "한-아세안 국민의 마음을 이어주는 문화 협력과 인적교류에 무게를 두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 9년 전 한-아세안센터 설립을 준비하다가 수장으로 복귀한 소감이 어떤가.
▲ 그때는 사무실을 구하는 것부터 모든 게 어려웠다. 지난 9년간 한국과 아세안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직원들도 헌신적으로 일한 덕분에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그동안 한-아세안센터가 축적한 역량과 노하우에다 내가 아세안 국가에서 두 번이나 대사를 지낸 경험 등을 접목해 실질적인 성과를 내도록 하겠다.
--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취임하게 돼 어깨가 무겁겠다.
▲ 아세안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교역 파트너이자 투자 대상이다. 역사적으로도 한국과 매우 가깝고 국민 간에 동질감과 연대감을 지니고 있다. 최근 사드 배치로 인해 중국과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포스트 차이나'로서의 경제적·외교안보적 가치도 한층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아세안이 호혜적인 협력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신남방정책은 시의적절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전 세계에서 아세안 10개 회원국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8.6%인데 GDP 비중은 3.4%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뜻이다. 35세 이하가 65%를 차지할 만큼 평균 연령이 낮아 성장 가능성도 높다. 한-아세안센터의 책임이 크고 할 일도 많다.
-- 앞으로 역점을 둘 사업이나 분야는 무엇인가.
▲ 투자사절단 파견, 공동 워크숍, 무역전시회, 음식축제, 유학생 교류행사 등 우리가 연간 펼치는 사업이 50여 개다. 올해부터 아세안 국가들이 한-아세안센터로 파견한 관련 분야 공무원들과 함께 각국의 맞춤형 사업들을 기획하고 있다. 한국과 아세안이 동등하고 윈윈(win-win)하는 동반자적 관계라는 점을 인식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수요자가 원하고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을 펼쳐 나가겠다.
-- 아세안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중국과 일본도 각각 중-아세안센터와 일-아세안센터를 설립해 아세안과의 협력 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나라에 비해 우리가 지닌 강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 중국과 일본에 견주면 우리나라가 강대국은 아니다. 따라서 과거의 상처도 없고 안보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도 아니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베트남·필리핀·말레이시아·브루나이 등과 갈등을 빚고 있고, 일본은 2차대전 당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했다. 또 한국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아세안 여러 나라가 롤모델로 삼고 있다. 아세안이 한류의 거점이라고 할 만큼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다.
--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세 변화가 한-아세안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 아세안 회원국들은 남북관계에 관해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한-아세안 관계도 더욱 발전할 것이다. 특히 베트남이 86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추진하는 도이머이 정책으로 고도성장과 정권의 안정을 이룬 경험을 전하며 북한의 경제 개방을 이끄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대사 재임 기간에 대통령이 베트남을 두 차례나 방문해 일은 많아도 보람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인 감독들이 잇따라 베트남 스포츠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룩한 것도 뿌듯한 일이었겠다.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다낭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 참석한 데 이어 지난달 베트남을 국빈방문했다.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고 보람이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박충건 감독의 지도를 받은 사격의 호앙쑤안빈 선수가 베트남 역사상 첫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23세 이하(U-23) 아시아축구연맹(AFC)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인들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베트남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국과 베트남이 손을 잡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감독들은 베트남 선수들이 지닌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이고, 한국인 감독들에게 기회를 준 베트남 사격연맹과 축구협회에 감사드린다"고 말해 베트남인들의 박수를 많이 받았다.
-- 필리핀 대사로 재임할 때는 이자스민 씨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는데 현지 분위기는 어땠는가.
▲ 이자스민 의원 덕분에 필리핀에서도 한국을 매우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 우리나라 외교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
-- 우리나라에는 아세안 회원국 출신의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유학생 등이 많다.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도 아세안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아세안과의 관계를 4강 외교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하지만 인적교류만 따지면 이미 4강을 넘어섰다. 요즘은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도 모국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SNS로 늘 소통한다. 이들이 한국에서 겪은 일이 실시간으로 각국에 전달돼 한국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아세안 회원국의 대부분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뒤졌지만 한때 우리보다 잘살았던 적이 있고 6·25 때 우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개개인으로 보면 우리보다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아세안 출신 이주민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평등한 지구촌 세계시민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아세안에 진출한 동포(교민) 역시 마찬가지다. 현지인을 가르치려 들거나 베푼다는 의식을 버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