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갑질, 드라마가 과한 게 아니었네
'리턴' '같이 살래요' '황금빛 내 인생' '리멤버' 등 현실과 오버랩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드라마에서 과하게 그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현실에 등장하는 게 있다. 재벌 갑질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분야라 어떻게 그려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든 게 재벌가 이야기인데, 재벌들의 안하무인 갑질 역시 마찬가지다. 당해본 사람만 알고, 그나마도 대부분 '쉬쉬' 넘어가서 잘 알려지지 않는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광고담당 전무의 이른바 '갑질 논란'에 대해 경찰이 13일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업무상 지위에 관한 '갑질' 행위에 대해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히 수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조 전무의 갑질 논란은 때마침 금수저 갑질로 떠들썩했던 SBS TV '리턴'이 종영한 후 터져 나왔다.
드라마에서 다뤄온 재벌 갑질을 돌아봤다.
◇ 공통점은…안하무인, 분노조절 장애
지난달 종영한 SBS TV 드라마 '리턴'에서 봉태규를 각광 받게 한 '김학범'이라는 역할은 안하무인,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황금수저'였다. 앞뒤 생각 없고, 대책 없이 행동하면서 온갖 폭력을 일삼는 황금수저의 만행은 시청자의 분노를 유발했다.
김학범은 종교 관련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집안의 2세로, 수억짜리 외제차를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듯 바꿔가는 부자다. 심지어 집안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의 교수님이시다. 김학범은 평상시 만민평등주의에 입각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반말을 일삼고, 돈으로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돈 줄게 한대만 맞자"고 제안하는 등 언제 어디서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여성들을 대동해 환란의 파티를 열다가도 수틀리면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고,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일을 일상적으로 했다.
KBS 2TV 주말극 '같이 살래요'에서는 김권이 연기하는 '김문식'이라는 인물이 아예 "갑질이 주업"인 캐릭터다. 역시 부동산 큰손의 아들로 "언제나 천상천하 절대 갑"이며, 돈으로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부지다.
그런 그가 최근 본격적으로 갑질에 들어간 게 있으니, 복도에서 지나가다 부딪힌 청년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감히 자신과 부딪혔고 발을 밟았다는 이유, 그런데 엎드려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가 치민 김문식은 그 청년을 수소문해 적극 보복에 나섰다.
이 드라마는 재벌 가문도 다루는데 재벌 2세 채희경(김윤경 분)은 '서민' 출신인 올케 집안을 사사건건 깔보는 것은 물론이고, 늘 고압적인 태도다.
극중 또다른 재벌 2세의 상습 폭행도 등장했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회사 부하들을 상시 두들겨 패던 재벌 2세의 만행이 어느날 우연히 동영상으로 찍히면서 덜미가 잡힌 에피소드였다.
재벌 2세는 왜 때렸냐는 질문에 "(부하의)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서"라고 답하는 등 상식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자칫 묻힐 뻔했던 그의 만행은 폭행 영상으로 인해 공개됐고 그는 처벌을 받게 됐다.
SBS TV 월화극 '키스 먼저 할까요?'는 초반에 재벌 3세의 10대 소녀 손이든(정다빈)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서 승무원을 하녀처럼 부리는 내용이 펼쳐졌다. 10대 미성년자임에도 돈이 권력임을 너무 잘 아는 이 재벌 3세는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모습이었다.
지난달 끝난 KBS 2TV '황금빛 내 인생' 역시 황금만능주의로 무장한 재벌일가의 이야기를 한 축으로 다루면서 그들의 갑질을 곳곳에서 다뤘다. 노양호(김병기) 회장 일가는 돈을 써 사람을 납치, 감금, 협박하는 것은 기본이고, 본인들은 '일반인'들과 다르다는 비뚤어진 선민의식 속에서 툭하면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려 했다.
앞서 남궁민을 스타덤에 올린 SBS TV '리멤버- 아들의 전쟁'은 분노조절 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는 망나니 재벌 2세 남규만의 악행을 쫓아갔다. "별거 아닌 일에 꼭지가 돌고, 한번 흥분하면 이성을 잃고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설명이 붙은 캐릭터다. 황금수저인 그는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드라마는 현실의 거울…"과도한 폭력적 묘사는 문제"
작가들은 대개 현실의 에피소드를 차용해 이 같은 재벌 갑질을 묘사한다. 뉴스를 떠들썩하게 장식하는 사건들은 물론이고, 나름의 취재를 통해 재벌가의 갑질을 드라마에 녹여내며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 '베테랑'이 이른바 '맷값 폭행'을 저지른 최철원(최태원 SK회장 사촌동생) 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최씨는 2010년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유모씨를 폭행하고 '맷값'으로 2천만원을 줘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를 받았다. 최씨 사건은 '베테랑' 외에도 많은 드라마에서 계속해서 다루는 단골 소재가 됐다.
광고업계에 따르면 조 전무는 지난달 16일 대한항공 공항동 본사에서 자사 광고를 대행하는 A 업체의 광고팀장 B 씨에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향해 물을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2월에는 조 전무의 언니이자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이 '땅콩 회항'으로 떠들썩하게 물의를 일으켰다.
지난해 1월에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씨가 술에 만취해 대형 로펌 변호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가 고발당했다.
한 드라마 프로듀서는 13일 "재벌가 이야기는 시청자에게 항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며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도 재벌이고, 범죄극의 주인공도 재벌이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져온 이야기라 하더라도 TV 드라마에서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재벌 갑질을 다루면 그 역시 문제가 된다. '리턴'이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정 제재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리턴'의 관계자는 "금수저들의 갑질 범죄행위에 대한 분노에서 드라마가 출발하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이었다"면서도 "TV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해 앞으로 표현에서 좀더 신중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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