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정보원 활동 의혹 크리스테바 "나는 감시체제 희생자"
홈페이지에 성명 올려 거듭 부인…"과거 인터뷰 그대로 수록하는 등 문건 조잡해"
동독 비밀경찰 연구 독일학자도 가세…"체제안보기구 문건 해석 매우 신중해야"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냉전시대 불가리아 비밀경찰의 정보원으로 프랑스 문화계와 좌파진영의 동향을 보고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76)가 또 한 번 관련 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구(舊) 동독 등 공산정권 비밀경찰의 활동을 연구해온 학자도 가세해 크리스테바가 정보기관의 조작과 감시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테바는 지난 9일(현지시간) 자신의 홈페이지에 성명을 올려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관련 보도를 일체 부인했다. 지난달 프랑스 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가 불가리아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의혹을 보도한 이후 세 번째 반박이다.
그는 "비밀경찰의 수법이 여전히 가공할 만하고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감시목록에 올려 사찰하고 (하지도 않은) 발언을 했다고 기록하고, 역할과 기능을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등의 수법은 이미 알려진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스테바는 "오늘날 학자와 언론인들은 이런 조작은 물론, 관련 정보를 편향된 기구가 이용하는 것에 항의한다"면서 "조잡한 수준의 문건조작은 내가 썼다고 알려진 정보서류에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불가리아 과거사위원회가 발굴했다는 정보문건에는 자신이 1970년대 프랑스 잡지와 한 인터뷰 일부가 불가리어로 번역돼 그대로 수록됐다고 한다.
공산정권의 비밀경찰과 이들이 감시한 지식인 문제에 천착해온 독일의 역사학자도 작가 크리스타 볼프와 밀란 쿤데라의 사례를 들며 크리스테바를 옹호하고 나섰다.
독일 베를린의 마르크 블로흐 센터 연구위원인 소니아 콩브 박사(역사학)는 지난 4일 르몽드 기고문에서 냉전 시대 공산정권 비밀경찰의 기록들을 해석하기에 앞서 그들이 관례로 사용하는 표현이나 관행 등의 '문법'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보원에게 암호명이 붙었다고 해서 그가 스파이가 되는데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로지 기관이 포섭하려고 했거나, 감시했다는 것의 증거일 뿐이며 독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1929∼2011)의 경우가 그 대표 사례"라고 했다. '카산드라', '나누어진 하늘' 등을 쓴 볼프는 동독 출신 작가로 세계적인 반열에 올라 통일 전에 이미 서독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다.
콩브 박사는 먼저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의 자료들이 독일 통일 후 공개됐을 때 "XX가 우리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등의 기록으로 많은 지식인이 곤욕을 치른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포섭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그들을 내쫓지 않는 한 기관원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결코 포섭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59년 동독의 슈타지는 출판사 편집자였던 볼프를 정보원으로 포섭하려고 접촉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작가들의 동향을 보고하라는 임무였다.
서슬 퍼런 슈타지의 강압적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했지만, 볼프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과 평가 등 체제안보에 별 쓸모가 없는 정보만 제공했고, 접선 장소로 은밀한 제3의 안가를 제시한 슈타지 요원에게는 꼭 자신의 거주지에서 만나자고 고집했다고 한다.
또 아무에게도 접촉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슈타지의 요구를 무시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으며, 자신의 보고는 객관적이지 않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해 대조하라는 단서도 달았다.
콩브 박사는 "당시 슈타지 요원은 '볼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게 뭔지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고 기록했고, 볼프가 다른 곳으로 이사한 뒤 정보원 임무는 흐지부지 종결됐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정보원'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볼프는 그러나 독일 통일 후 슈타지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서독 언론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다.
사회주의자였지만 동독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던, 동독 최고 소설가의 반열에 오른 볼프의 명성은 해명하기도 전에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 역시 미국 간첩을 1950년대에 밀고한 당사자로 지목된 적이 있다. 공산정권 비밀경찰의 부역자라는 보도가 나오자 쿤데라는 은둔 생활을 깨고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섰고, 당시 상황의 복잡함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콩브 박사는 이런 사례를 들며 "표현의 자유가 없던 곳에서 체제에 저항하는 것은 감옥행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누가 첩보원이고 밀고자인지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비밀경찰의 문건의 아우라는 너무도 강력해서 우리는 그것이 정보조작의 원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쉽게 믿어버린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다"며 크리스테바를 옹호했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예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문학·정신분석학·언어학·기호학 분야에서 업적을 쌓은 석학 중의 한 명이다.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접근법으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탐구해 '사랑의 역사', '시적 언어의 혁명', '공포의 권력' 등 30권이 넘는 저서를 냈으며 국내에도 그의 책 다수가 번역돼 나와 있다.
불가리아 과거사위원회는 최근 크리스테바가 냉전 시대 불가리아 국가보위부 제1부 소속의 정보원으로 암호명 '사비나'로 프랑스 지성계의 동향을 보고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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