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사랑한 왕자 '안평대군'은 야심가였나 희생자였나

입력 2018-04-11 07:20
수정 2018-04-11 09:14
예술을 사랑한 왕자 '안평대군'은 야심가였나 희생자였나

심경호 고려대 교수, 평전 '안평'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와 사이에서 8남 2녀를 낳았다. 장자는 문종, 둘째 아들은 수양대군, 셋째 아들은 안평대군이다. 수양대군은 문종과 세 살 터울이었고, 안평대군과는 한 살 차이가 났다.

오랫동안 세종을 보필한 문종은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1450년 즉위해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왕권은 적장자인 단종에게 넘어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는 명제는 동서고금에서 두루 확인된다. 문종을 따랐던 동생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세조가 됐다. 그 과정에서 1453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안평대군은 이 난에 휘말려 강화도로 귀양을 떠났고, 결국 사사됐다.

안평대군이 권력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는지, 왕이 되고자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도 최근 출간한 안평대군의 평전 '안평'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과연 야심가였나, 아니면 희생자였나.

단종실록에는 안평대군이 역모의 뜻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 예컨대 "어느 때나 햇빛이 커져서/ 밝고 밝게 사방에 비칠꼬"라는 안평대군의 시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호 중에는 '낭간거사'가 있다. 저자는 거사(居士)라는 단어에 '정치의 장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안평대군에게 정치적으로 큰 야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안평대군은 음모를 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계유정난의 경과를 서술하는 단종실록의 기록은 날조물의 집적"이라며 "단종실록 편수자들은 국정과 관련 없는 안평대군의 언행을 날짜에 맞춰 안배하고, 악의적인 인물 평가를 부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은 왜 동생을 죽인 것일까. 저자는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에게 느꼈을 열등감을 거론한다.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은 함께 공부했는데, 한시를 짓는 재주는 안평대군에게만 있었다. 학문적 재능이 탁월했다는 문종도 자유자재로 시를 적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시에 관한 격차는 조선 초기 문학의 중흥 시기에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매우 뼈아픈 결함이었다"며 "수양대군은 잘 갖춰진 한시를 끝까지 짓지 못했고, 이로 인한 열등감이 동생을 죽이는 주요한 계기가 됐다"고 강조한다.

분명한 사실은 안평대군이 예술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이다. 안견이 1447년 그린 회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뒤에는 안평대군이 정연하게 쓴 글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에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의 양자가 된 안평대군은 먹과 벼루를 벗 삼아 감수성을 발전시켰다. 그는 조맹부체를 배워 활달하면서도 우아하고 귀족적인 필체를 구사했으며, 명화를 많이 소장하고 그림을 모사하는 일도 추진했다.

이처럼 예술적 감각과 지적 능력을 갖춘 안평대군은 문사들과 어울리며 시와 그림, 글씨를 즐겼다. 저자는 안평대군이 참가한 예술 모임이 정치권력을 수중에 넣고자 했던 수양대군의 눈에는 세력화로 비쳤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문학예술 모임 자체가 권력 행위로 여겨졌던 시대에 안평대군의 행위는 실제 목적이야 어떻든 그 자체가 권력의 현시로 보였을 것"이라며 "이 점이 안평대군의 비극이 지닌 진정한 의미"라고 결론짓는다.

"안평대군의 35년간 삶을 꿈속에 노닒, 즉 '몽유'(夢遊)라고 규정해도 좋으리라. 그 꿈은 질척질척하여 깨어난 뒤 뒷맛이 씁쓸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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