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과 선원, 노예들…노예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신간 '노예선'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지금까지 노예제도의 이야기는 주로 노예로 끌려온 뒤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농장에서 학대당하는 노예와 그들을 학대하는 주인의 이야기나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문학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가능하게 해준 노예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수백 년간 노예들은 배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왔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통계 속 숫자로 이야기될 뿐,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연구가 많지 않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책 '노예선'(갈무리 펴냄)에서 노예선에 초점을 맞춰 우리가 몰랐던 노예제도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대략 1500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기간 1천240만명이 노예선에 올랐다. '검은 상품'이었던 이들은 서부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사이 노예무역 항로인 '중간항로'(middle passage)를 통해 수백 곳의 '배달 지점'으로 이동했다. 노예선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180만명이 사망했다. 중간항로는 대량 학살의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1700년부터 1808년은 전체 노예의 3분의 2가 '운송'된 이른바 '황금의 시대'였다.
책은 '황금의 시대' 노예들은 물론, 선장과 선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예선의 모습을 촘촘히 재구성한다.
노예선에서는 선장과 선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예선의 지배는 처벌과 억제를 토대로 했다. 많은 노예는 이미 묶여있는 상태에서 배에 탔다. 모든 남자의 손목과 다리에는 수갑, 족쇄가 채워졌다. 선장과 선원들은 끝에 매듭이 달린 아홉 가닥의 가지가 뻗은 일명 '구교묘'(九翹猫)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배에서는 노예들의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운동을 시켰는데 이때도 역시 채찍이 사용됐다. 음식을 거부하는 노예들에게는 스펙큘럼 오리스라는 도구를 이용해 강제로 목구멍을 개방하고 입에 죽을 퍼부었다.
폭동을 일으킨 노예들에게는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 엄지손가락을 기구에 넣으면 위에서 나사를 죄는 고문을 했다. 커다란 요리사용 포크를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데웠다가 반란자의 살을 지지기도 했다. 머리와 몸, 팔다리를 잘라내는, 말 그대로 '능지처참'이 행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노예들은 하갑판에서 생활했다. 수갑과 족쇄,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은 간신히 몸만 돌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서 사실상 '적재'된 상태로 생활했다. 땀과 구토, 피, 배설물통이 뒤범벅이 된 하갑판은 질식 직전의 상황이었다. 밤새 하갑판에서 죽은 노예의 시체는 아침마다 주갑판에 끌어올려 진 다음 바다에 던져져 상어밥이 됐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조건'에서도 하갑판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고 저항을 시작했다.
서아프리카는 다언어 사회였지만 노예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대화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노래로 의사소통하며 가족과 친구, 동족을 잃은 심정을 달랬다.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고 배 밖으로 뛰어내려 노예로 팔려갈 인생을 스스로 끝내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집단저항은 폭동과 선상 반란으로 나타났다. 선상 반란의 일반적인 결과는 패배였고 그 뒤에는 고문과 괴롭힘, 테러가 이어지지만 그래도 저항은 계속됐다.
설사 배를 장악했다 해도 노예들은 함선을 운용하는 법을 몰라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노예들은 혼령이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집단 자살을 하기도 했다. 노예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노예를 '상품'으로 대했지만,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책은 노예뿐만 아니라 노예선의 또 다른 구성원인 선장과 선원의 이야기에도 눈길을 돌린다.
선원은 노예들에게는 가해자였지만 선장과의 관계에서는 그들도 약자였다. 폭력은 선장이 선원들을 괴롭히면 선원들이 노예를 고문하는 식으로 계승됐다.
노예선의 선장들이 남긴 기록도 소개한다. 그중 존 뉴턴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장이다. 1748년부터 1754년까지 항해사로, 선장으로 총 4번 항해를 한 인물이다. 이후 목사가 됐던 그는 자신의 노예선 선장 경험을 참회하며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만들었고 노예무역 폐지론자가 됐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피로 얼룩진 자본주의의 부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동시에 이에 대항한 용감하고 다면적인 저항을 알게 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미국과 대서양 연안의 수많은 지역에서 우리는 여전히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결과를 안고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인종 차별, 해결 곤란한 빈곤, 깊은 구조적 불평등에 영향을 받고 있고 이런 문제는 모두 대서양 자본주의의 노예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자유의 미래로 가는 길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이 그 위대한 여정에 작은 공헌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박지순 옮김. 488쪽. 2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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