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빈자 돕는 것이 낙태에 맞서는 것 만큼이나 중요"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발표
"교리보다 자비" 재차 강조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3번째로 발표한 권고문을 통해 신앙 생활에서 가톨릭 교리보다는 자비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평소 주관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일 가톨릭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를 발표했다.
교황은 전 세계 13억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가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성스러운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길잡이 역할을 할 이 새로운 권고에서 가톨릭 규칙과 교리를 완벽히 지키는 교회의 엘리트들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신자들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권고에서 "가톨릭은 낙태 반대를 강력히 지지하지만, 태어나지 않은 생명 만큼이나 빈자, 버려진 사람, 병자, 은밀한 안락사 위험에 노출된 노인, 인신매매와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의 희생자, 모든 형태의 거부를 당한 사람 등 약자의 삶 또한 신성하다"고 지적했다.
평소 선진국이 전쟁과 기아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난 난민들을 환대해야 한다고 역설해 온 교황은 또한 44쪽 짜리 이 문서에서 낙태, 안락사와 같은 생명윤리학 측면의 문제에 비해 난민과 이민자들이 처한 고통을 덜 심각한 문제로 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도 밝혔다.
교황은 "표를 좇는 정치인들이라면 이런 행태가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은 자녀들에게 미래를 주기 위해 목숨을 건 형제, 자매들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고 주문했다.
교황은 아울러 "우리 삶은 우리가 타인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로 평가받는다. 신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특정한 윤리적 기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도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윤리와 교리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는 듯한 태도로 교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보수파들을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미국 출신의 레이몬드 버크 추기경을 위시한 가톨릭 보수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정의 사랑과 관련해 2016년 발표한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통해 이혼한 사람이나 재혼한 사람도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지금까지도 교황과 각을 세우고 있다.
자비에 기초해 개개인이 처한 상황을 판단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교황의 진보적인 입장은 금욕과 절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성윤리와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중시하는 가톨릭 보수파들의 교조적인 도덕 우선주의와 자주 충돌하고 있다.
버크 주교와 독일 출신의 발터 브란트뮬러 추기경은 지난 주말 로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도 성명을 발표, "'사랑의 기쁨'의 모호한 가르침으로 인해 전 세계 신자들 사이에서 불만과 혼란과 커지고 있다"며 결혼과 이혼과 관련해 전통적인 교회의 시각을 유지할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촉구했다.
한편, 최근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의 창립자 에우지니오 스칼파리가 교황이 자신과의 인터뷰 도중 "교황이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보도, 홍역을 치른 바 있는 교황은 이날 발표한 권고문에서는 증오와 시기, 악이라는 독으로 우리를 해치는 악마의 위험성이 실재한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교황청은 라 레푸블리카의 지옥 관련 보도 직후 성명을 내고 "보도된 것은 스칼파리가 재구성한 것의 결과물"이라며 "교황의 발언으로 인용된 부분은 교황의 말을 충실하게 전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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