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가 야생 멧돼지를 조종하는 방법은

입력 2018-04-05 07:25
지렁이가 야생 멧돼지를 조종하는 방법은

신간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누군가를 비난할 때 쓰이는 '벌레만도 못하다', '기생충 같다'라는 표현 속에는 벌레가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30년 넘게 산림감독관으로 지내온 숲 해설가 페터 볼레벤은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에는 자연의 네트워크 속에서 나름의 의미와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신간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더숲 펴냄)에서 시계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자연의 네트워크와 그 네트워크에 인간이 끼어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독일에서는 사냥꾼들이 추운 겨울에 먹이를 구하기 힘든 노루나 사슴, 야생멧돼지에게 사료나 옥수수알을 먹이로 주곤 한다.

좋은 의도였지만 인간의 먹이 주기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중부 유럽지역의 토종 나무종인 너도밤나무와 참나무는 수년 주기로 열매를 맺는다. 너도밤나무 열매는 지방 함유량이 50%고 도토리는 지방함량은 좀 낮지만 대신 녹말 함량이 50%다. 따라서 이들 열매는 동물들에게 '로또'나 다름없다. 이들 열매가 열리지 않는 시기에는 야생멧돼지나 노루, 사슴 등이 먹이를 구하기가 어렵게 돼 굶어 죽는 동물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무리의 개체 수가 조절된다. 열매를 매년 맺지 않는 것은 나무들의 '먹이 공급 제한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이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서 야생 멧돼지는 배고플 틈이 없어졌고 개체 수가 급증했다. 씨앗을 좋아하는 야생 멧돼지들이 숲 주변 씨앗을 있는 대로 먹어치우면서 나무들의 전략은 힘을 잃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숲의 미래는 어두울 것 같지만, 자연의 네트워크는 다시 작동한다.

야생 멧돼지에게는 숲 속 토양에 사는 지렁이 또한 좋은 먹이다. 씨앗을 찾느라 땅을 파헤친 멧돼지가 지렁이를 먹을 때 우폐충의 유충이 따라 들어간다. 유충은 멧돼지의 기관지에 잠복하다 성충이 되면 기관지를 공격하며 염증이나 출혈을 일으켜 죽게 한다. 나무의 전략은 힘을 잃었지만, 지렁이가 야생 멧돼지 개체 수의 다른 조절자가 된 것이다.

책은 이 밖에도 검은목두루미와 소시지 생산량의 상관관계, '숲의 경찰관이자 은밀한 정복자'인 개미, 나무와 연어와의 관계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연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연의 네트워크가 워낙 촘촘하게 짜여 있는 만큼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섣불리 자연에 손을 댔을 경우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인간의 개입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자연은 그대로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영옥 옮김. 332쪽. 1만6천원.

zitro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