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아랍의 봄' 사망…"뇌물·협박 난무한 '엉터리 대선'"

입력 2018-03-29 16:08
이집트 '아랍의 봄' 사망…"뇌물·협박 난무한 '엉터리 대선'"

유력후보들 출마못해 선거 전부터 엘시시 연임 '떼놓은당상'

투표율·정통성 높이려 돈주고 겁주는 '관권선거 추태' 만발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기자 = 2011년 '현대판 파라오'라 불린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축출을 이끌었던 '아랍의 봄'이 7년 뒤인 2018년 이집트 대선을 통해 그 생명을 다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권위주의 성향의 군인 출신 지도자인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의 승리는 유력후보들이 모두 축출되면서 선거 전부터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투표 과정에서도 뇌물, 협박, 금품수수, 당국의 개입 등이 기승을 부리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망가진 추한 몰골이 노출됐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는 28일 이집트 대선이 끝난 뒤 분석 기사를 통해 이집트 당국과 지지자들이 투표율을 끌어올리려고 갖은 추태를 부렸다고 보도했다.



WP는 더 나아가 "이번 대선이 이집트 사회에 균열을 노출했다"며 "'아랍의 봄' 유령들이 이집트의 '엉터리 선거'에서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이집트 유권자와 현지 기자, 외국 선거감시단원에 따르면 당국과 지방정부, 엘시시 충성파들은 사실상 경쟁이 없는 이번 대선에서 투표율 올리기에만 열을 올렸다.

높은 투표율로 엘시시 대통령의 연임과 대선 승리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차원이다.

이에 따라 엘시시 충성파들은 대선이 진행된 지난 사흘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표 독려에 나섰다.

이집트 칼리우비야주에 사는 일부 무슬림 유권자들은 투표율이 40%를 넘기면 그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에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다.

이집트 최고 수니파 종교기관 알아즈하르의 한 지방 사무소는 사전에 지정된 지도자들이 유권자 무리를 데리고 투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콥트교회 교구 일부는 투표율이 40% 이상을 기록하면 5천700달러를 받게 될 것이라는 제안도 받았다.

또한 유권자 몇몇은 투표권을 행사하겠다는 조건으로 엘시시 선거 캠프에 식료품을 달라고 요구했고 실제 그런 사례들이 있었다고 현지 이집트 기자 하산 후세인이 WP에 말했다.

저명한 한 사업가는 한 투표소에서 투표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닭 두 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후세인은 전했다.

이집트 주재 대사관에서 파견 나온 한 외국 선거감시단원은 카이로 시내의 투표소에서 현금이 오가는 장면을 2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이집트 언론과 당국의 노골적인 협박과 회유 정황도 포착됐다.

친정부 성향의 매체들은 대선이 치러지기 전 몇 달 동안 투표 행위는 '이집트에 반대하는 외국의 음모를 저지할 애국적 의미'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전달했다.

그러다 선거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이집트 정부 관리들은 '당근과 채찍' 정책을 꺼내 들었다.

지방 당국은 빈민촌에서 식용유와 설탕 등 식료품을 주며 유권들을 현혹했고 높은 투표율이 나오면 각 지방의 식수와 위생 시설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면 부정 선거를 우려해 대선 보이콧을 선언했던 야권 지도자와 시민단체는 친정부 지지자들로부터 '반역 행위'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 교도소에는 현재 엘시시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명의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주의 활동가들이 갇혀 있다.

이집트의 한 회사 매니저는 투표에 참여했다는 증표로 직원들의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 있는지 검사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선거 때 유권자들의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 다음 지문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신원을 확인한다.

유력 대권 주자들도 대선 시행 전 모두 체포되거나 수상쩍은 이유 등으로 불출마 선언을 했다.



AP통신은 지방 주지사와 공동체 지도자, 경찰, 학교, 성직자, 사업가 등이 투표율 끌어올리기 작전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이번 대선이 이집트 현대사에서 가장 심한 탄압이 가해지는 와중에 치러졌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집트 선거관리위원회 대변인은 이러한 지적에 대한 논평 요구에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고 WP는 전했다.

이집트 안팎에서 이번 대선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실종됐다.

이집트의 유명 활동가와 블로거, 다른 청년들은 이상하게 치러진 이번 대선에 침묵했고 서방 정부들도 이집트 당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에 이렇다 할 비판적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카이로 주재 미국대사관의 토마스 골드버거 대사 직무대행은 오히려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는 이집트 유권자들의 열정과 애국심에 감명을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WP는 2013년 군부가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사건을 상기하며 당시 엘시시가 TV 연설을 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애국적 음악에 맞춰 춤추던 장면은 '혁명은 죽었고 권위주의가 장악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WP는 이어 "이집트에서 누가 (대선에서) 승리할지에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사실상 엘시시 대통령의 압승을 전망했다.

이집트 분석가들은 대선 투표율이 2014년 대선 때와 비슷한 45%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공식 선거 결과는 내달 2일께 발표될 예정이다.

gogo21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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