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무공훈장'…화마에 터전 잃은 국가유공자 유가족

입력 2018-03-29 11:39
'불타버린 무공훈장'…화마에 터전 잃은 국가유공자 유가족

"지갑·휴대폰만 들고 몸만 빠져나와"…고성 산불로 주택 전소

농기구도 타 재기 '막막'…"더 힘들 때도 있었는데 방법 있겠지"

(고성=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아이고, 이게 훈장이 있던 자린데 싹 다 타서 녹아버렸네 그래…"



전날 발생한 산불로 집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최옥단(72)씨가 29일 오전 강원 고성군 죽왕면 가진리 자택 창고에서 남편 유품을 찾다가 녹아버린 무공훈장을 보고 한탄했다.

함께 온 아들 김법래(48)씨는 땜납 덩어리처럼 녹아버린 훈장을 내보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최씨의 남편 김남출씨는 1971년 월남전과 1987년 향로봉 무장간첩 생포 공로를 각각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두 번 받았다.

이후 2002년 이곳을 터전 삼아 벼농사와 고추밭을 가꾸다 5년 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최씨는 맨손으로 남편의 흔적을 뒤졌다.



"남편을 보내고 국가유공자 가족으로 힘들게 살면서도 집 한쪽에 고이 모신 훈장인데 알아볼 수도 없으니 이게 다 내 운명인가 보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8일 오전 6시를 넘길 무렵 아들 김씨는 매캐한 냄새에 눈을 떴다.

밖은 연기가 점점 번지는 상황에서 소방차와 경찰차가 집 건너편 산으로 줄지어 향했다.

때마침 의용소방대원이 전해준 산불 소식을 듣고 모자(母子)는 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자욱한 연기에 옷가지나 가재도구를 들고 나올 경황이 없어 지갑과 휴대전화만 챙겨 몸만 피할 수밖에 없었다.

공설운동장으로 어머니를 대피시키고 다시 집을 찾았을 때 불길은 앞마당을 지나 창고와 집 전체를 삼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정신이 혼미해졌고, 급히 보건소로 찾았더니 최씨의 혈압은 190/140mmHg 가까이 치솟았다. 김씨는 "평소 어머니가 저혈압을 앓고 있는데 충격에 혈압이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최씨는 의사가 준 혈압 하강제를 먹은 뒤 겨우 잠들 수 있었고, 김씨는 불에 탄 집과 앞으로 농사 걱정, 어머니 걱정에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집을 찾았을 때, 마당에 키우던 백구 '바우'가 주인을 반갑게 맞았다.

최씨는 개를 끌어안고 "바우야 미안하다 바우야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렸다.

네 평 남짓한 컨테이너를 빼놓고 집 전체가 불에 타버린 모습이었다. 2002년 이사 와서 16년 동안 살던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잃은 것이다.

김씨는 컨테이너 안에서 병풍을 꺼내 들었다.



그 위에는 훈장증, 국가유공자증, 공로표창장, 감사장 등이 빼곡히 붙어있었다.

그는 "이것들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며 증서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폈다.

하늘 위로 헬기 굉음이 들리자 개들은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숨기며 불안한 듯 주인을 찾았다.

활짝 핀 매화나무 아래서 모자는 개들을 살피며 오는 봄을 걱정했다.

농기구와 농약, 비료 등이 모두 타버려 당장 올해 농사가 막막한 까닭이다.

최씨는 바우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더 힘든 삶도 살아냈는데 방법이 있겠지. 다만 나라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걱정해주고 살길을 찾아줬으면 좋겠네."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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