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지금 자신들의 운명 결정권 일부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미국 안보분석 업체 "지정학적, 역사적 현실과 씨름해야 하는" 한반도 설명
"주변 열강은 남북 통일 원치 않거나 '통일됐지만 약한' 한반도 원해"…"김정은 방중은 새 대외관계 지향 진지함 의미"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지금, 서울과 평양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 일부를 되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열린 남북대화 국면에 대해 미국의 외교안보 분석 업체 스트랫포는 "오늘날 남·북한은 그들이 처한 지정학적, 역사적 현실과 씨름하고 있다"며 이같이 논평했다.
남한이 처한 지정학적 현실에 대해 스트랫포는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관계 개선과 대미 안보관계 사이에서, 그리고 대중 관계와 대미 관계 사이에서, 또한 대일 역사적 반감과 한미동맹 틀에서 일본과 협력할 필요성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역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중국이나 러시아에 완전히 등 돌릴 수는 없다"고 스트랫포는 지적했다. 핵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북한이 대국들과 관계를 새로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고 기대하는 핵 프로그램의 완성을 목전에 뒀지만,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핵무기를) 자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북한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북한의 한계를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 싸인 한반도는 고립을 택하거나 강대국 간 경쟁 속에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을 택했고, 이는 현재의 남·북한 전략의 핵심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북한은 고립을 택했고, 남한은 주변 강대국들간 경쟁의 틈을 활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남북 분단과 적대, 전쟁, 전복 활동 등은 남북 모두에 대해 이런 외교정책의 구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남·북한은 분단된 상태에선 내재적으로 허약할 뿐 아니라, 서로 싸우면서 역내 열강 간 경쟁의 최전선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통일되어도 한반도가 안보 환경을 주도적으로 형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통일된 한반도보다 더 센 강대국들의 힘이 합류하는 지점에 놓인 한반도의 지정학상, 이들 열강은 한반도의 재통일을 원치 않고 있고, 통일 되더라도 최소한 경쟁 관계인 강대국이 한반도에 일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강하고 독립된 한반도는 어떠한 역내 열강도 원치 않는 것"이라고 스트랫포는 강조했다. "이들은 '통일됐지만 힘이 약한' 한반도 정도는 자신들 사이의 완충국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스트랫포는 말하고 "재통일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도전 때문이 아니더라도 통일 한반도는 여전히 방어적 입장에 머물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한반도가 씨름하고 있는 지정학적, 역사적 현실에 대한 스트랫포의 이러한 설명은 한반도 바깥 세계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을 1막으로, 북한 핵을 소재로 한 동북아 대서사 극이 펼쳐질 예정인 가운데 한반도 주민들도 새삼 돌아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올해 봄이 그 드라마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시작일지, 존 볼턴의 백악관 안보보좌관 기용 후 우려가 커지고 있는 파멸적 결말의 시작일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다. 27일 북·중 정상회담은 이 드라마의 도입부에 해당하지만 결말을 예측할 뚜렷한 실마리를 보여 주진 않았다. 다만 "북한이 국제사회 내부에서 위상과 관계를 새로 형성하는 데에 점점 진지해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스트랫포는 말했다. 기만적 목적은 아니라는 풀이다.
남·북한은 완충국 역할을 통해 안보를 보장받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안보는 종종 주권의 희생이라는 비용을 치른다"고 스트랫포는 지적했다. 냉전 이래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안보를 기댔고, 남한은 미국에 의존했다. 그 결과 "남북한 모두 행동의 자유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남한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공업 개발과 핵무기 개발을 통해 주도적으로 안보 환경 구축을 시도한 적이 있고, 북한 역시 군사력 증강과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통해 안보와 독립을 동시에 손에 넣으려 시도하고 있다.
남·북한이 열강들의 경쟁에서 이득을 취할 때도 때때로 있긴 했지만 "자신들의 안보 환경을 온전하게 스스로 조성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스트랫포는 지적했다.
스트랫포는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이 방중설로 첫 보도된 26일(현지시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지렛대로 중국과의 관계를 더 대등하게 만들려는 생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장기적 목표에 속하는 것이고, 현재로썬 "중국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 없는" 처지라고 설명했다.
대중 의존도를 줄이고 싶어도, 중국의 대북 제재 참여에 화가 났어도 "김정은이 휴전협정을 영구적인 평화체제로 대체하려면 중국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또한 한반도 정세와 미국 태도의 급변에 놀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 뿐 아니라 북·일·미 3자 정상회담까지 거론하는 데 대해서도 일축하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른바 '재팬 패싱'을 우려해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드라마에 비중 있게 출연하고 싶은 만큼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도 앞으로 일본의 경제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일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냉전은 끝났을지 모르나 "한반도는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를 한편으로 하고 미국과 일본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열강들의 경쟁의 중심에 있다"고 스트랫포는 거듭 말하고 "한반도의 주변 환경은 변할 수 있지만 그 지리적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반도가 열강의 틈 속에서 안보와 독립을 동시에 지키는 게 지난한 일이라는 뜻이다.
yd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