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맞은 정경화 "'레전드' 소리 들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요"
33번째 앨범 발표…"평생 한 폭의 그림 그리는 게 목표"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제 이름 앞에 자꾸 '레전드'를 붙여주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레전드 정도가 되면 뭘 해도 쉽게 쓱쓱 나올 것 같은데 전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뭘 해도 아직도 이렇게 기를 써야 하고 힘이 들어요."
'바이올린 여제',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수식어가 잔뜩 붙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0)는 이 같은 호칭들이 '끔찍하다"며 웃었다. 올해로 칠순을 맞은 그는 아직도 현 위에서 "기가 막힌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정경화는 27일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에서 열린 33번째 앨범 발표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어쩌다 보니 우연히 여기까지 왔다"는 농담으로 소감을 전했다.
6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한 정경화는 13세 때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장학생으로 입학해 명교수 이반 갈라미언(1903∼1981)을 사사했으며 1967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70년 영국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앙드레 프레빈 지휘로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며 유럽 클래식계의 스타로 부상했다. 당시만 해도 유럽 무대에서 동양인 연주자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공기를 벨 듯한 예리함과 무대를 압도하는 강렬한 사운드로 '동양의 마녀', '아시아의 암호랑이' 등으로 불렸다. 연주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데굴데굴 구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는 "어떻게든 내 속에 있는 걸 다 빼내서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객석에 앉은 한 명 한 명이 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저마다 얼마나 몸부림치며 인생을 살아나갑니까. 음악은 위로입니다. 본인의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서 음악 속에서 함께 흔들리고 미움도 받고 사랑도 느끼는 게 바로 음악이 줄 수 있는 위로죠. 그런 걸 관객에게 주고 싶어서 평생 만 퍼센트 노력했어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게 관객입니다."
그런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2005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왼손 손가락 부상이었다. 그는 이 부상으로 5년간 바이올린 연주를 중단하고 줄리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긍정적이었던 어머니는 항상 '제일 힘든 일이 있을 때 제일 좋은 길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가르치셨어요. '제일 힘든 순간에 다른 것들을 쳐다보지 말고 공부하라'고도 말씀하셨죠. 그 가르침대로 손을 다쳤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여러 방향을 생각하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다시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되고, 녹음하게 될 줄을 상상도 못 했죠."
그는 다시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된 것을 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무대 위로 돌아온 그는 2016년 평생 숙원으로 남아있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한 데 이어 올해 33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을 발매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포레와 프랑크, 드뷔시의 작품들로 채운 곡이다.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앨범 중심에 배치하고 각 작곡가를 대표하는 유명한 소품인 포레의 '자장가',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을 디저트처럼 엮었다.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와 '아름다운 저녁'도 포함됐다. 정경화의 녹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친숙해진 엘가의 '사랑의 인사'도 32년 만에 새롭게 녹음해 한국판 앨범에 보너스 트랙에 넣었다.
정경화는 "33번째 앨범을 낸다니까 익숙한 일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녹음할 때마다 '힘들어서 다신 못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온 기력과 정성을 다했다"고 말했다.
포레의 '자장가'는 "손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녹음했다"며 웃었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도 수년째 호흡을 맞춰온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함께 했다. 간담회의 사회자가 케빈 케너를 "반주자"로 소개하자 "듀오 파트너"라고 따로 정정할 정도로 신뢰와 애정이 각별하다.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저와 케빈 케너만의 해석이 담겼다고 할 수 있어요. 서로 다른 연주자와 이 곡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포레 소나타는 어쩐지 감도 안 오고 늘 힘들게만 느껴졌는데, 케빈 케너와 파트너를 맺은 뒤 용기를 내어 처음 도전한 곡입니다."
이전에 사용했던 1734년산 과르니에리 델 제수 '로데' 대신 이번 녹음에 함께한 170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킹 맥스'도 그와 "친해지고 있는" 새 친구다.
"이제 체력이 안 돼서 음이 빠지고 활에서도 지저분한 소리가 나기도 해요. 그렇지만 예전처럼 수치스러움에 머리 쥐어뜯던 때는 지났어요.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과 평화에 초점을 두고 계속 음악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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