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 누가 브레이크 걸까…제구실 못 하는 WTO

입력 2018-03-25 07:30
[무역전쟁] 누가 브레이크 걸까…제구실 못 하는 WTO

WTO 체제 산파 역할 한 미국이 WTO 흔들어…중재 기능 유명무실

컨센서스 방식에 새로운 합의도 불가능…"美 없는 WTO 준비해야 할수도"

(제네바=연합뉴스) 이광철 특파원 = 이달 8일(현지시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열린 일반 총회 참가국들 대표 사이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 미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 1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이날 회의에서는 유럽연합(EU)을 시작으로 미국에 무역전쟁 중단을 촉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EU 대표가 먼저 미국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 회의가 지연됐고 눈치 보기 끝에 결국 중국 대표가 첫 발언에 나섰다.

트럼프 정부 관세 정책이 글로벌 무역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며 중국이 포문을 열자 캐나다가 뒤를 이었고 EU와 호주, 한국, 일본, 멕시코, 인도, 브라질 등 18개국이 합류했다.

164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WTO에서 미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 해프닝이다.



WTO 체제를 향한 미국의 불만은 다른 곳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무역분쟁의 최종심(2심)을 담당하는 심판기구인 WTO 상소기구는 미국이 위원 선임을 문제 삼으면서 공석으로 있는 위원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등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

상소기구는 사법체계로 치면 대법원에 해당하는 중요한 기구다. 7명의 상소기구 위원은 164개국이 동의(컨센서스)해야 선임될 수 있다.

미국은 2016년 6월 1차 임기가 끝난 장승화(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위원의 연임을 반대했다. 상소기구 위원은 1차 4년 임기를 마치면 한 차례 연임하는 게 관례다.

당시 미국이 이 관례를 깨고 장 위원의 연임을 반대하자 캐나다, 멕시코, EU, 브라질, 베트남 등 15개국은 미국이 WTO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성명을 내며 이례적으로 미국을 비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설에서 "미국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던 위원을 제거해 WTO를 전복하려 한다"며 "표면적으로는 장 위원이 법을 과도하게 해석했다고 하지만 그가 미국 입장을 지지하지 않은 게 이유다"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상소기구 인적 구성을 물고 늘어지면서 그사이 3명의 위원직이 공석이 됐다. 장 위원의 후임으로 선출됐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사퇴하고 멕시코, 벨기에 출신 위원들은 임기가 지난해 끝났다.

인도, 미국, 모리셔스, 중국 등 4개국 출신 위원만 남아 있다.

상소 기구는 분쟁 당사국이 상소하면 통상 60일 이내에 1심 패널 판단을 심리하도록 돼 있지만 공석 사태로 사건 처리에 허덕이고 있다.



1995년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 체제의 종식과 WTO 출범을 주도했던 미국은 23년 만에 WTO의 근본 체제를 뒤흔들고 있다.

단순 협정으로 상품 교역에만 국한됐던 GATT 체제와 달리 WTO는 무역기구로서 서비스, 지적 재산권 분야까지 다루고 분쟁해결 기능까지 갖게 됐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관세 폭탄 정책으로 존폐를 거론하는 상황까지 직면했다.

미국이 500억 달러(약 54조원) 규모의 중국 수입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자 중국이 30억 달러(3조2천400억원) 규모 미국산 철강, 돈육에 보복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는 등 무역전쟁의 도미노는 이미 넘어졌어도 WTO의 역할은 없다.

WTO의 한 관계자는 "WTO는 실체가 없는 건물에 불과하다. 실제 활동은 개별 회원국이 주도하기 때문에 무역전쟁이 벌어지더라도 WTO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무역전쟁에 관세 면제를 조건으로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드러나고 있어 미·중 무역전쟁은 전방위로 확산할 우려도 점점 커지고 있다.

WTO의 각종 회의에 참가하는 각국 대표단은 최근 피로감을 호소한다.

양자협상을 선호하는 미국의 무역정책 탓에 회의마다 컨센서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사 문제로 트럼프 정부가 출범 초기 혼선을 빚을 때는 WTO 회의에 참석한 미국 관료들이 의사결정을 미뤄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회원국 통상장관이 참석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이지만 미국은 "현재 규정이 준수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규정을 협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시작 전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달 19∼2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도 경제수장들은 무역전쟁에 대한 우려만 쏟아내고 구체적인 정책 도출에는 실패했다.



WTO 심판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상소기구에서 판정을 내리더라도 당사국이 이행하지 않으면 맞대응할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규정에는 불이행 때 보복할 수단이 명시돼 있어도 미국, 중국 등 무역 강대국을 상대로 보복 카드를 꺼낼 수 있는 회원국은 거의 없다. 규정대로 보복관세를 부과하면 또 다른 보복 조치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2007∼2011년 WTO 상소기구 위원을 지낸 제니퍼 힐만 전 미국 무역위원회(USITC) 위원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미국이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보호무역 을 선포한 것에 대해 "WTO가 존재 방식 자체에 많은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파스칼 라미 전 WTO 사무총장은 "WTO 회원국들은 미국이 없는 WTO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mino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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