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세총리' 리커창 어쩌나…"왕치산·류허, 시진핑 대신 협공"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최측근인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과 류허(劉鶴) 부총리를 통해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퇴진한 자신의 '오른팔' 왕치산 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국가부주석으로 복귀시킨 데 이어 중학교 동창이자 자신의 경제 브레인인 류허 중앙재경영도소 판공실 주임을 '실세' 부총리로 올리면서 리 총리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리커창 총리가 맡아온 경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이 신임하는 중량급 인사들을 동원해 협공을 펼치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왕치산 국가부주석이 외교 총책으로서 미중 무역관계를 책임지고, 류허 부총리가 재경·금융 사령탑으로 경제전략 수립을 맡게 되면 리 총리의 경제 권한의 비중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왕치산과 류허는 국무원 부처에 각각 류쿤(劉昆) 재정부장과 이강(易綱) 인민은행장이라는 실무 측근을 숨겨두고 있다.
류 부장은 왕치산이 1999년 광둥(廣東)성 부성장 시절 광둥 국제신탁투자공사의 50억달러 파산 사태를 담당할 당시 대책팀장을 맡았던 인사였고 이 행장은 류허와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의 주임과 부주임으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국무원내 재경·통상·금융 정책의 기획과 결정, 실행이 리커창 총리를 '패싱'해 류쿤-왕치산, 이강-류허 라인을 타고 시 주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5년전 시진핑 집권 당시 시 주석의 정권 동반자로 일컬어지며 경제 전권을 장악했던 리커창 총리의 위상은 이미 2년여전부터 급격히 추락해왔다. 반부패 드라이브로 왕치산 당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역할이 강화되며 시·리(習·李) 체제는 시·왕(習·王) 체제로 바뀌었다.
실물경제, 도시화 추진, 권한 이양 등을 중시한 리코노믹스(리커창+이코노믹스)가 중국 경제방향의 주축에서 밀려나더니 지금은 시코노믹스(시진핑+이코노믹스)가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시코노믹스는 류 부총리가 제시한 3거1강1보(三去一降一補)이라는 공급측 구조개혁과 함께 대외적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발전 전략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즉, 과잉공급 해소, 부동산 재고 소진, 부채 축소(3거)와 함께 기업 비용 절감(1강), 취약 부문 개선(1보)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2016년 5월 류 부총리로 추정되는 '권위 있는 인사' 명의로 인터뷰한 기사에서 "통화 완화 같은 경제부양책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며 공급측 구조개혁을 강조했다.
이 인터뷰 기사를 계기로 리 총리의 중국 경제 장악력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9차 당대회를 즈음해 시진핑 1인 체제가 구축돼 사실상 집단지도체제가 와해되면서 리 총리는 시 주석에게 업무를 보고해야 하는 '상하' 관계로 바뀌었다.
올해 들어서도 시 주석을 대신해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일명 다보스포럼)에서 중국 경제 방향을 밝히거나 무역갈등 협상을 위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인사는 리 총리가 아닌 류 부총리였다.
시 주석은 전방위로 리 총리의 국무원을 압박하는 모습이다. 최근 이뤄진 국무원 기구개혁에서도 정부급(正部級·장관급) 부처가 8개, 부부급(副部級·차관급) 부처가 7개 줄어들고 '작은 국무원'으로 불리던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권한도 대폭 축소됐다.
시 주석이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 역시 리 총리의 국무원 권한 약화를 염두에 둔 대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당 소조에서 활동하던 류허가 부총리로서 국무원에 진출함에 따라 국무원의 정책 결정 구조가 크게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왕치산 국가부주석이 시 주석이 조장을 맡고 있는 당 중앙외사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외교 업무를 총괄하게 되면 국무원 외교부의 외교 주도권이 다소 약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한 중국 소식통은 "왕치산이 미중 통상과 외교 방향을, 류허가 재경, 금융 전반을 관장하게 되면서 리 총리의 향후 5년간 직권은 지난 5년 임기 때보다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 총리가 지난 18일 전인대의 표결 동의에 이어 최종 절차로 시 주석의 서명 인가를 받고 나서야 재선이 확정된 것은 '상하' 관계가 다시 '군신' 관계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권한과 직무범위가 크게 줄어든 리 총리가 앞으로 주력해야 할 업무는 시 주석이 3대 공략과제로 지목한 빈곤퇴치, 대기오염 해결, 리스크 예방 등의 난제에 불과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joo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