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안창남과 권기옥, 창공을 날다

입력 2018-03-15 07:31
[김은주의 시선] 안창남과 권기옥, 창공을 날다

(서울=연합뉴스) "기다리던 날이 왔다. 조선의 비행가가 조선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나는 날이 왔다. 여의도 넓으나 넓은 마당은 만여 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양편으로 거룩한 조선지도를 그린 금강호는 맑고 맑은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가는 듯하고 만여 명 학생이 들고 섰는 환영 깃발은 봄동산에 나비 날 듯 기쁜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안 군은 차차 높이 떠서 일천 미터 이상에 높이로 뜨니 한없이 맑은 하늘에 장쾌한 소리만 은은히 들리고 비행기는 아믈하게 떠서 한강을 지나 남산 가로 좇아 동대문 편으로 돌아 창덕궁에 예를 하고 경성을 한번 돈 후 비행기는 공중에서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새 같이 세로 핑핑 돌아 안 군의 독특한 재주를 보이니 관중은 꿈인 듯 취한 듯 박수갈채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반도의 천공(天空)에 최초의 환희'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

1922년 12월 10일은 우리나라 항공사에서 기념할 만한 날이다. 비행사 안창남이 여의도 간이비행장에서 고국 방문 비행을 했다. 찬바람이 부는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5만 명이 이를 지켜보며 환호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던 시절이었다. 여의도로 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남대문 역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임시열차가 편성됐다.



안창남은 1901년 3월 19일 서울 종로구 평동에서 출생했다. 16세이던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로 했다.

휘문보통중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 서울로 돌아와 운수업에 종사했다. 1919년 8월부터 반년 동안 도쿄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 기계부에서 비행 조정을 배우고, 1920년 8월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들어가 석 달 만인 11월 졸업했다.

그해 잡지 '개벽' 12월호에 도쿄특파원 방정환이 쓴 '조선 비행가 안창남'이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국내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안창남도 이 잡지에 '오쿠리 비행학교에서'라는 수필을 실었다.

안창남은 1921년 5월 일본 민간비행사 시험에서 공동 1등으로 합격, 면허증을 받았다. 6월에는 지바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며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1월에는 그에게 비행기를 사주자면서 2만 원 모금을 목표로 후원회가 결성됐으나 성과는 없었다. 안창남은 1922년 11월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 시합에서 일본인 비행사를 제치고 우수상을 받고 2등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안창남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1922년 11월 29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박영효, 권동진 등 주요 인사 47명이 참여한 '안창남 군 고국 방문 후원회'가 조직됐다.



안창남은 대대적인 환영 속에 12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12월 10일 안창남은 영국제 뉴포트 단발쌍엽 1인승 비행기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여의도 하늘에서 고공비행의 묘기를 보인 뒤 착륙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운 비행이었다. 안창남은 1923년 7월 1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했다.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국내신문에는 안창남 사망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조선인 학살 만행이 자행되는 것을 목격한 안창남은 비행 기술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하고 1924년 12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25년 1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했으나 비행학교를 설립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중국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루는 방법을 생각하고 1926년 산시 성 군벌 옌시산(閻錫山) 휘하에서 항공중장과 산시비행학교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산시 성 타이위엔(太原)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추락해 사망했다.



안창남을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20년 한장호, 이용선,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 등 한인 비행사 6명이 미국에서 하늘을 날았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항일투쟁을 벌여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교포들의 후원으로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주 클랜카운티 윌로스에 한인 전투비행사양성학교를 세웠다. 위의 비행사 6명은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비행학교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한인 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권기옥은 안창남보다 두 달 빠른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출생했다. 11살에 은단 공장에 취직해 집안 살림을 돕다가 이듬해 숭현소학교에 들어갔다.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권기옥은 당시 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했다. 숭의여학교 재학 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평양경찰서에 3주일 동안 구류됐다. 그 후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비밀공작을 전개했다.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다가 발동기 없는 목선을 타고 상하이로 탈출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독립전쟁을 위해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3년 윈난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권기옥은 1925년 2월 비행사 자격을 얻었다. 조선과 중국 양국에서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된 것이다. 3월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소개로 중국의 항일운동가 펑위샹(馮玉祥) 휘하 공군에 들어갔다. 권기옥은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항일전선에서 싸웠다.

권기옥은 1928년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했다. 이상정은 대구 계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다 1923년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1926년부터 펑위샹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했으며, 장제스의 부대와 통합되면서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했다.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신한민주혁명당을 조직하는 한편 화중군 사령부 고급 막료로 난징전투 등에 참전해 일제와 싸웠다. 이상정의 동생이 민족시인 이상화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권기옥은 충칭으로 옮겨가 국민정부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일했다. 중일전쟁 당시 총 7천 시간을 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3년 충칭 임시정부 직할로 한국 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여 한국 여성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이들을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켰다. 권기옥은 해방 후 1948년 8월 귀국해 한국 공군 창설에 이바지했다.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최초의 여성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전선을 누볐다. 1988년 4월 19일 사망했다.



우리나라 항공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안창남이 고국 비행을 한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 10월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다.

안창남과 권기옥. 초기 항공의 역사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간다.

안창남이 고국 비행을 했던 1922년은 3.1운동의 열기가 사그라지고 민족의 독립 의지도 약해지던 시기였다. 멀리 중국에서 전해오는 비행사들의 활약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었다. 특히 안창남은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준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비행사였다. 3월의 푸른 하늘, 조국 해방의 꿈을 안고 창공을 날던 이들의 열정을 기억해본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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