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과 인권 신경전 필리핀, 인권보고관에 '테러범 딱지'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마약과의 전쟁' 등 과정에서 초법적 처형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와 신경전을 벌여온 필리핀이 이번에는 토착민 인권 문제를 조사하는 유엔 특별보고관을 테러범 목록에 포함해 논란을 빚고 있다.
11일 영국 톰슨 로이터 재단에 따르면 필리핀 법무부는 지난달 600여 명의 마오주의 공산 게릴라를 테러범으로 지정하겠다며 법원에 승인을 요청했다.
필리핀 정부가 제출한 테러범 지정 후보 가운데는 유엔 토착민 인권 보고관으로 활동 중인 빅토리아 타울리-코푸즈가 포함됐다.
필리핀 북부 루손 섬에 있는 마운틴주(州) 베사오에서 태어난 타울리-코푸즈는 소수민족인 이고로트족 관련 활동가로 일해왔고, 지난 2014년 유엔 토착민 인권 보고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지난해 12월 공산 반군의 주요 활동지인 남부 민다나오 섬에서 토착민 수천명이 군사작전 와중에 강제로 피란길에 올랐다면서 당국에 토착민 학대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처럼 토착민 보호 활동을 해온 그를 테러범으로 몰아세운 필리핀 정부의 조처에 당사자는 물론 국제사회도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타울리-코푸즈는 "나에게 테러범 혐의를 씌운 것은 근거 없는 악의적 조처"라며 "정부는 이를 통해 싫어하는 인물을 잡아넣으려 한다. 나는 물론 리스트에 오른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필리핀 정부가 이번에 작성한 테러범 목록을 "가상의 정부 공격 대상 명단"이라고 규정했다.
익명을 요구한 2명의 유엔 특별보고관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일부 정책에 반대한 데 따른 처벌"이라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필리핀 코르디예라 지역의 이고로트족 지도자도 "인권 문제에 집중된 세간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시민단체인 PAN 아시아퍼시픽에 따르면 필리핀은 지난해 정부의 농촌 커뮤니티 탄압으로 땅과 자원을 지키려던 토착민이 가장 많이 희생된 국가다. 농민과 토착민 그리고 활동가들에 대한 살해 등 탄압이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이 단체는 전했다.
토착민 문제에 관한 국제 실무 그룹(IWGIA)은 필리핀 정부가 정기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토착민들을 위협하거나 학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필리핀에서는 지난 2016년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후 마약 유혈소탕전 등 과정에서 수천 명이 경찰관과 자경단 등에 의해 재판과정 없이 현장에서 사살됐다.
국제사회는 이런 필리핀의 초법적 사형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를 무시한 채 최근 경찰의 마약범 단속 재개를 승인했다.
또 두테르테는 법원에만 주어졌던 범죄 관련자 '소환권'을 경찰 총수에게도 허용하는 법안에 서명해 논란을 빚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두테르테는 최근 마약 유혈소탕전을 밀어붙이는 과정에 발생한 초법적 처형 의혹을 조사하는 유엔 조사단을 모욕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이런 두테르테를 겨냥해 "정신감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비판했지만, 두테르테 측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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