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료만으로는 못 살아"…노점 운영에 뛰어든 한양 군인

입력 2018-03-01 09:55
수정 2018-03-01 10:16
"급료만으로는 못 살아"…노점 운영에 뛰어든 한양 군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훈국등록' 역주본·연구서 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1593년 일본의 조총 부대에 대항할 포수를 양성하기 위해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립했다.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훈련도감 소속 군인은 1600년 전후에 1천∼2천 명 수준이었으나, 17세기 후반에는 6천∼7천 명으로 늘어났다.

급격하게 인원이 증가하다 보니 훈련도감의 재정과 군인들의 거처가 문제가 됐다. 훈련도감이 접수한 문서를 빠짐없이 적은 '훈국등록'(訓局謄錄)에는 "훈련도감의 포수 등이 지방에서 올라오면 당장 머무를 곳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조선 후기 군제의 변화와 군사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인 훈국등록의 역주본 발간을 시작하면서 훈련도감에 대한 다양한 글을 엮은 연구서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와 '조선 최정예 군대의 탄생'을 펴냈다.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인정사정, 조선 군대 생활사'에 실은 글 '서울 군인들의 먹고사는 문제'에서 훈련도감 군인들의 생활난을 소개했다.

조 교수는 "훈련도감의 군사가 된다는 것은 면역(免役)이나 면천(免賤)의 기회를 얻고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다는 점에서 꽤 매력적이었다"면서도 "급료는 17세기 들어 9말 또는 12말로 인상됐지만,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훈련도감 군인은 급료와 함께 옷감인 보포(保布)를 받았는데, 이 역시도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훈련도감 군인들은 결국 상업이나 수공업에 뛰어들었다. 본래 군인은 상품을 매매할 권리가 없었지만, 조선 조정은 군병의 생계 안정을 위해 노점 영업을 허가했다.

하지만 군인들이 상업을 병행하자 시전 상인들의 불만은 커졌고, 왕과 정부에 난전의 병폐를 지적하는 장사꾼도 있었다.

실제로 훈국등록 1731년 1월 24일 기사에는 "난전의 폐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인데, 군문 소속의 경우에는 특히 더욱 심한 실정"이라며 "군병들이 시중에서 포목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사사로이 팔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 교수는 "훈련도감 군인은 부업으로 농업과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며 "서울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상업적 농업을 지향하고 벼보다는 채소류 작물을 재배한 점이 군인 농업의 특징이었다"고 설명했다.



두 권의 연구서에는 이외에도 흥미로운 글이 많이 실렸다. 윤양노 중부대 교수는 무명 13겹으로 만든 조선의 갑옷을 논했고,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깃발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훈련도감 군인들의 동전 만들기, 왕의 나들이와 호위 지침, 훈련도감이 북한산으로 간 이유 등에 관한 논고도 수록됐다.

연구서의 분량은 각각 320쪽이며, 가격은 각권 1만6천원이다.

한편 훈국등록 역주본은 이번에 1∼2권이 나왔고, 2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과 장유승 단국대 책임연구원 등이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1권은 436쪽, 2권은 524쪽이며, 가격은 각권 3만5천원이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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