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반 위의 악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영화 '아이, 토냐'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린 미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강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꼽히던 낸시 케리건이 대회 직전 괴한에게 쇠몽둥이로 무릎을 얻어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FBI까지 나서 수사한 결과 사건의 충격적 전모가 드러났다. 폭력을 사주한 이들은 낸시 케리건의 최대 라이벌 토냐 하딩의 전 남편 제프 길룰리와 보디가드 숀 에크하트였다. 토냐 하딩은 올림픽 이후 자신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고 시인하고 미국피겨스케이팅연맹에서 영구제명됐다.
빙판을 떠난 토냐 하딩은 남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둘러 법정에 섰고 프로복서로 변신해 링에 오르기도 했다. 20년 넘게 지난 요즘도 '악녀'의 대명사로 통한다. '아이, 토냐'는 토냐 하딩의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며 무엇이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영화는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과 그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인물, 어머니 라보나 골든(엘리슨 재니)과 제프 길룰리(세바스찬 스탠)의 진술을 토대로 전개된다. 세 사람의 말은 때때로 엇갈린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토냐 하딩의 악명이 오로지 타고난 성정 때문만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라보나는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어머니였다. 네 살 먹은 딸을 스케이트장에 데려간 이유도 뛰어난 피겨 선수로 키우기보다는 돈벌이에 이용해보려는 생각이었다. 학교도 그만두고 연습에 몰두한 토냐는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선수로는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다.
토냐는 어머니의 폭력을 피해 열다섯 살에 만난 제프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토냐에게 권총까지 겨누는 제프는 폭력을 사랑의 표현으로 정당화한다. 이는 결국 캐리건 피습사건으로 발전해 토냐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가난한 가정에서 거칠게 자란 토냐에겐 사회가 피겨 선수에게 요구하는 기본 덕목인 우아함이 없었다. 경기에 나서기 전, 스케이트 날로 담배를 비벼 끄는 토냐의 모습은 '미국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하드록을 배경음악으로 연기하는 괴짜 선수가 라이벌 피습사건에 연루됐음이 드러나자 언론은 그를 순식간에 악녀로 만든다.
영화는 낸시 케리건 피습사건에 토냐가 얼마큼 개입했으며 언론은 어떻게 악녀 이미지를 만들어냈는지 자세히 밝힌다. 토냐를 비난하면서도 흥행을 위해 낸시 케리건과 함께 올림픽에 출전시키는 스포츠 비즈니스의 이중적 면모도 꼬집는다.
다큐멘터리 픽션 형식으로 토냐의 생애를 조명하는 영화의 시선은 진지하다. 그러나 감각적 편집과 블랙 유머 덕분에 무겁지 않다. 모성애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는 엘리슨 재니의 섬뜩한 악역 연기가 영화의 재미에 한몫한다.
아마추어 아이스하키 선수이기도 한 마고 로비는 5개월간 피겨 스케이팅을 연습해 20여 년 전 토냐 하딩의 연기를 재현했다. 영화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여우조연·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청소년 관람불가. 3월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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