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풀' 작가 김금숙

입력 2018-03-10 08:01
[연합이매진] '풀' 작가 김금숙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한 맺힌 삶을 만화로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역사적 3.1운동이 어느덧 99주년을 맞았다. 국권을 빼앗긴 한민족은 거국적 독립선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광복 70년이 지났건만 일제의 뼈아픈 상처는 청산되지 못한 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위안부' 문제다. 김금숙(47) 만화작가는 지난해 8월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만화 '풀'을 출간, 역사의 발자국을 되짚고 그 치유책을 모색해 화제가 됐다. 김 작가를 만나 '풀'의 창작 동기와 과정을 작금의 상황에 대한 견해와 함께 들어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권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은 민족·국가의 문제를 떠나 본질적으로 인권 문제이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들께서 얼마나 속상하실까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아베 총리는 국가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해요."

일본대사관 건너편의 소녀상 앞에서 기자와 만난 김 작가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아베 총리가 고수하는 주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아베 총리는 '12·28 합의'와 관련해 "1mm도 움직일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방한한 그는 지난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그분들(위안부 할머니)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 해결될 수 있지 정부 간 주고받기로 해결할 수 없다"며 선을 분명히 긋고 있는 상태다.

"이제 3.1절도 100주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가 되면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되찾기 위해 투쟁한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가끔 해요. 내가 그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구요. 여성 인권, 성폭력의 이야기인 제 만화작품 '풀'은 과거에 일어난 역사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현재 진행형입니다."

◇ 위안부 할머니의 한 맺힌 삶 그린 '풀'

'풀'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이옥선(91)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490쪽 분량의 흑백 그림으로 들려주는 장편 만화 소설이다.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에 살던 이 할머니가 1996년 55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부산의 열여섯 살 '옥선이 가시나'가 일본 강점기에 어떻게 중국으로 끌려가 끔찍한 일을 겪었고, 일제 패망 후에도 여기저기를 떠돌며 얼마나 신산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수묵화처럼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돌아봤다.

'세계 위안부의 날'인 지난해 8월 14일 출간된 이 만화 소설은 위안부 할머니를 소극적 피해자로만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주체적 의지를 강하게 갖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당당히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내어 주목받았다.

제목을 '풀'이라고 정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 작가는 "모든 생명은 귀중하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을 작품 '풀'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중하지 않은 풀은 없습니다. 바람에 스러지고 권력과 군화에 짓밟혀도 끈질기게 다시 일어서는 생명력의 존재가 바로 풀이지요. 민중은 바로 풀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그래요. 이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김 작가는 작품이 나온 뒤 시인 김수영의 시 '풀'이 상징하는 이미지가 자신의 만화가 담고 있는 의미와 너무도 흡사해 깜짝 놀라고 반가웠다고 들려줬다. 시 '풀'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며 그 강인한 생명력을 찬탄했다.

작품의 말미에 차례로 나오는 글귀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 못잖게 가슴을 뭉클하게 울린다. 고난의 겨울이 가고 희망의 봄이 다가와서 더 그런가. 문구 하나하나가 아픔을 딛고 일어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싶다.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여린 나뭇가지, 안으로부터 살을 헤집고 나올 새로운 생명의 몸부림"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 어쩌면 당신의 다리를 스치며 수줍게 인사할지도 모른다"

"봄을 품은 겨울이 간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추위를 녹이고 어느새 봄이 우리 곁에 소리 없이 다가와 있다"

◇ "할머니를 쓰담쓰담 위로해주고 싶었다"

김씨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데는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일본 강점기에 10대 나이로 수양딸로 보내진 뒤 생사가 끊긴 큰이모의 삶이 가족들에게는 깊은 한으로 남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거나 수양딸로 가면 공부시켜주고 밥도 먹여준다는 등의 거짓말로 속여 여성들을 군대 위안소로 보낸 경우가 허다했다.

"저는 20대 초반부터 프랑스에서 살면서 위안부 관련 통역과 번역을 하거나 영화 포스터 제작 등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단편 만화 '비밀'을 만들었지요. 하지만 '비밀'을 완성한 뒤 잠을 설칠 정도로 시달렸습니다. 여성의 관점, 약자의 관점에서 얘기하지 못했고 피해 할머니들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내면의 절실함이 작품 '풀'을 낳게 했지요."

김 작가와 이옥선 할머니의 만남은 운명과도 같았다.

2014년에 펴낸 만화책 '꼬깽이' 1, 2권을 들고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에 가서 놓고 왔는데 다음번에 방문했을 때 이 할머니가 이 책을 보면서 너무도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더라는 것이다. 김 작가는 "그날 햇살이 눈부시게 할머니를 비추었고, 그 햇살을 받은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면서 "그때 바로 '아, 이 할머니구나!' 하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모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할머니를 자주 찾아뵈었어요. 굉장히 강하신 분으로 유머도 많고 농담도 곧잘 하셨지만 어느 순간이면 안아주고 싶을 만큼 조그만 여자아이로 변해 있었어요. 할머니를 만나는 동안 학교 가고 싶은 어린 옥선이, 위안소에 붙잡힌 옥선이, 전쟁 후 떠도는 옥선이 등을 보았습니다. 안아주고도 싶었고, 쓰담쓰담 위로해주고도 싶었습니다."

김 작가는 "간식을 드실 때는 나도 먹으라고 꼭 챙겨줄 정도로 참 따스한 분이셨다"고 회고하면서 "전쟁이 끝나고 중국에 버려진 할머니의 인생은 갖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을 땐 나 자신도 목이 멨다"고 덧붙였다.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작품을 제작한 이유는 색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고 집중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가장 미니멀한 색과 단순함이 더욱 진한 감동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작가는 '위안부' 문제의 확실한 해법은 일본 정부의 범죄 인정과 진정한 사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생존 할머니들의 연세가 대부분 아흔 살이 넘은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돈이라고 한다면 이는 완전히 잘못된 얘기라는 것이다.



◇ "풀, 일본, 중국에서도 꼭 출간됐으면…"

김 작가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만화가가 되려고 꿈꾼 적이 결코 없었단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고등장식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파리로 이사한 그는 화가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현실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우울과 절망, 가난 속에 몇 년을 보내다 2004년 만화 번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2008년 처음으로 만화를 그린 뒤 성취감으로 한껏 고무돼 이듬해부터는 작품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만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지 그 당시에 새삼 발견했어요. 저렴한 재료와 작은 공간에서도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예술 장르가 바로 만화였습니다. 새로운 기회의 발견이랄까요. 만화가로 데뷔한 게 나이 40살이 훌쩍 넘어서이니 늦깎이인 셈입니다."

2012년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된 뒤 이듬해 한국에서도 간행된 첫 단행본 '아버지의 노래'를 시작으로 '지슬'(2014년), '꼬깽이'(2014년) 등이 잇달아 나왔다. '아버지의 노래'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엘도라도의 꿈을 안고 시골에서 서울로 온 수많은 소시민의 삶을 한 가정사로 바라본 만화작품. '꼬깽이'는 서울의 달동네로 이사와 겪는 차별, 가난 등의 삶을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들려준다. 그리고 '지슬'은 제주 4·3사건을 그린 만화 소설이다.

대표작 '풀'은 한국어판에 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프랑스어판은 김 작가 본인이 직접 번역을 맡고 올여름 출간될 예정이다. 스페인어판과 이탈리아어판은 올해 말과 내년 초쯤 독자를 만나게 된다. 김 작가는 "이옥선 할머니가 고난의 삶을 사셨던 중국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고난을 안겼던 일본에서도 꼭 출간됐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나타냈다.

현재 준비하는 작품은 자폐 뮤지션인 최준에 관한 만화 소설(가제 '준이 이야기')이다. 1990년생인 준이는 생후 30개월에 발달 장애 2급 판정을 받고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녔다. 하지만 음악을 만나면서 비로소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해졌고,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작곡가와 피아노 병창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선다는 점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얼추 닮기도 했다.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도 살아남기 힘든 게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입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인간 존엄과 평등이 결핍된 사회에서 준이와 그 가족의 따스한 이야기로 장애인 인권과 교육 시스템 등 우리 현실을 만화로 그려보려 합니다. 올해 말까지 내려 하는데 '풀'에 이어 제 마음에 가장 와 닿는 이야기랍니다."

한편 김 작가는 3월 17일부터 4월 22일까지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에서 '풀'의 원화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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