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귀담아 듣는 자리에서 시가 생겨나죠"

입력 2018-02-18 12:00
문태준 시인 "귀담아 듣는 자리에서 시가 생겨나죠"

새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펴내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관계에 대한 사유, 존재와 존재 사이의 주고받음, 그물처럼 얽혀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오래 해왔는데, 이번에는 그 관계에서 너와 나란 분별,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곧 너다, 내가 곧 다른 존재다' 이런 느낌을 얘기하는 거죠."

새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를 펴낸 문태준(48) 시인은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번 시집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을 내며 시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고요한 시선으로 세상을 지그시 바라보는 담백하고 서정적인 시들은 시의 문외한조차도 쉽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들 역시 그런 미덕을 변함없이 지니고 있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시인의 말대로 존재와 관계에 관한 더 깊어진 사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들어서는 여기는/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나는 희미해져요/나는 사라져요//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나는 모래알, 잎새/나는 이제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산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저녁이 올 때' 중)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역시 그런 융합의 경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본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이나 '우리는 서로에게' 같은 시도 널리 애송될 만하다.

"우리는 서로에게/환한 등불/남을 온기/움직이는 별/멀리 가는 날개/여러 계절 가꾼 정원/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풀에게는 풀여치/가을에게는 갈잎/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고통의 구체적인 원인/날마다 석양/너무 큰 외투/우리는 서로에게/절반/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우리는 서로에게' 전문)

이번 시집의 문을 여는 '일륜월륜(日輪月輪)- 전혁림의 그림에 부쳐'는 전혁림 화백의 그림에서 두드러진 색채인 오방색처럼 생명의 조화로운 순환을 바라보며 "꽃, 돌, 물, 산은 아름다운 바퀴라네/이 마음은 아름다운 바퀴라네/해와 달은 내 님의 하늘을 굴러가네"라고 노래한다.

자연과 생명을 보듬는 순백의 마음은 동심과도 연결된다. '염소야'를 비롯해 '동시 세 편'이란 제목 아래 묶인 '가을', '시험 망친 날', '얼마나 익었나' 등 동시들도 싱그럽다.

"염소야, 네가 시름시름 앓을 때 아버지는 따뜻한 재로 너를 덮어주셨지/나는 네 몸을 덮은 재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너의 곁을 지켰지/염소야, 새로 돋은 풀잎들은 이처럼 활달한데/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이 봄을 다 덮을 듯한데/염소야, 잊지 않고 해마다 가꾼 풀밭을 너에게 다 줄게!/네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염소야'라고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가 울림을 주는 이 시는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보드랍게 어루만지는 듯하다.





삭막한 도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잠깐의 달콤한 휴식을 청한다.

"사람들은 꽃나무 아래서 서로의 콩트를 읽는다/나른하게 낮잠을 즐긴다/낮잠 위로는 또 꽃잎이 날려 꿈을 얇게 덮는다/오, 우리가 이처럼 잠잘 때/우리의 봄꿈은 밤까지 그리고 다시 낮까지/꼬박 하루만 이어졌으면" ('일일일야(一日一夜)' 중)

시인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지내는 풍경을 보며 평온과 평화, 휴일의 안식이 하룻밤 정도라도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집의 제목에 관해 묻자 그는 수줍은 듯 웃었다. '사모'라는 말 때문이다.

"사모는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는, 누군가를 내 속에 앉히는 것이죠. 앉힐 수 있다는 마음은 굉장히 유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인 것 같아요. 내가 모시는 분의 뜻에 따르겠다는 동의와 지지가 포함된 말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내가 옹립한다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게 사람뿐 아니라 여러 존재의 범주까지 넓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랜 세월 이런 한결같은 시심(詩心)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뭔지 묻자 그는 이런 대답을 내놨다.

"주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을 더 미루고 다른 얘기를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시가 생겨나는 거죠."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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