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아들이 대신 쓴 '평범한 개인' 부모의 자서전

입력 2018-01-31 14:08
수정 2018-01-31 14:30
사회학자 아들이 대신 쓴 '평범한 개인' 부모의 자서전

노명우 아주대 교수 '인생극장'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는 글이나 영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복원돼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나 평범한 개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냥 조용히 사라진다.

사회학자인 노명우 아주대 교수의 부모도 평범한 개인들이었다.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부모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노 교수는 부모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로 아버지, 어머니의 자서전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신간 '인생극장'(사계절 펴냄)은 아들이 대신 쓴 부모의 자서전이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저자의 부모는 아들이 만든 '인생극장'에서 비로소 주인공이 됐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지만 세상을 떠난 부모의 개인적 기록은 많지 않았다. 저자는 부모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부모가 살았던 공간들을 직접 찾아가고 1920∼1970년대 당대의 풍속을 담고 있는 한국 대중영화를 보며 부모의 삶을 상상했다.

부모의 삶을 따라 진행되는 인생극장에서는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 전쟁, 군부 독재, 산업화 등 현대사의 큰 줄기가 배경이 된다. 1924년생 아버지는 식민지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당시 유행대로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만주로 건너갔다. 강제징용돼 일본 나고야에도 갔고 전쟁 이후에는 미군기지 근처에 정착했다. 아내에게는 전혀 살갑지 않았지만 밖에서는 돈 잘 쓰고 호탕한 '전형적인' 한국남성이었다.

1936년생 어머니는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나 당시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전쟁통에 고아가 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결혼해 파주 미군기지 근처에서 미장원을 열고 '양공주'의 머리를 말았다. 늘 한복을 입은 것은 '양공주'들과 자신을 구분짓기 위해서였다. 자상한 '젊은 엄마'가 돼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게 꿈이었던 어머니 역시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건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다.

저자는 아버지가 유년시절을 보낸 1920∼1930년대 평범한 농촌의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1925), 기록영화 'Tyosen'(1939)을, 식민지 국민학교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 '수업료'(1940)를 본다. 징용병이 황군이 되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린 선전영화 '병정님'(1944)에서는 나고야로 징용 갔던 아버지의 심정을 떠올린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는 영화 속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길'을 내면화했던 어머니를 생각하고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억척스럽고 독립적인 여성을 그린 '또순이'의 주인공을 보면서는 어머니가 참조했을 그 시대의 가장 모범적인 여성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한다.

영화 속 대사에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부모들의 심정을 읽어낸다. "미국 놈이나 한국 놈이나 사내는 다 같애. 그저 돈이 제일이다, 얘."(지옥화, 1958), "애비가 못 배웠으면 자식들이라도 가르쳐야지."(수학여행, 1969).

'인생극장' 북트레일러

1950∼1970년대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생활했던 부모의 이야기에서는 당시 시대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미군 기지촌은 여러 이유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사연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저자의 부모도 그랬다. 가족 재건을 위한 경제적 자원은 미군의 달러였다. 만주에서 익힌 사진기술로 미군을 상대로 한 사진관을 차려 '달러를 쓸어모은' 아버지는 '레인보우 클럽'이라는 미군 상대 위스키 시음장을 세웠고 '야매' 미용사 자격증을 만든 어머니는 그 옆에 '양색시'를 위한 '레인보우 미용실'을 차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원조경제의 시대 미국 달러와 미제가 위력을 발휘하고 일본어 대신 영어의 중요성이 커지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9년 아시아 주둔 미군 축소계획에 따라 주한 미군 철수가 시작되면서 '레인보우 클럽'이 '무지개 다방'으로 바뀌는 모습은 미군 기지촌의 형성과 쇠퇴에 이르는 과정을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책은 노명우의 부모 자서전으로 시작했지만 식민지 시대 유년시절을 보내고 해방되자마자 전쟁을 겪었으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많은 보통사람의 인생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아들이 대신 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서전에서는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무수히 많은 보통사람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평범한 삶의 다른 뜻은 보편적 삶"이라고 말했다. 448쪽. 1만7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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