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국악 경계 넓힌 '갸야금 명인' 황병기…"해독제 같은 음악"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31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야금 명인 황병기는 전통의 명맥을 이어나가면서도 다양한 장르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현대 국악의 경계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생전 자신을 "10대의 마음을 지닌 유치한 노인"이라는 우스갯소리로 평했을 정도로 장르나 세대를 넘나드는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전쟁 피란 시절인 1951년 가야금을 처음 접했다.
경기중 3학년생이던 그는 '가야금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권유로 접한 이 악기의 둥둥 뜨는 소리에 첫눈에 반한 뒤 평생을 함께했다.
그는 이후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의 수상 등으로 '엘리트 국악 신동'으로 주목받지만,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국악과가 없었던 데다가 국악으로 먹고살기 어렵다고 생각한 부모의 만류도 극심했다.
그러나 법대 재학 시절에도 그는 가야금을 놓지 않았고, 운명처럼 그가 졸업한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개설되면서 그는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이화여대 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아르코(ARKO) 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 등을 지내며 국악계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의 예술세계는 1962년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선보이며 가야금 연주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현대 가야금곡으로 꼽히는 '숲'을 발표했다.
3년 뒤 그는 '숲'과 가야금 산조 등이 담긴 첫 음반 '뮤직 프롬 코리아: 더 가야금(Music From Korea: The Kayakeum)'을 미국 하와이에서 발표했고, 이 음반에 대해 미국의 평단(음반 비평지 스테레오 리뷰)은 "황병기의 가야금 작품은 오늘의 하이 스피드 시대에 정신적인 해독제로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정신적인 해독제"는 그가 생전 특별히 아꼈던 리뷰다.
그는 이후 국악의 지평을 신라 시대까지 넓힌 '침향무'가 담긴 작곡집 '침향무'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그릇에서 영감을 받은 '비단길', 초현실주의를 시도한 대표작 '미궁', '춘설' 등을 잇달아 내놨다.
작년에도 신작 가곡 '광화문'을 발표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생명체로서 인간의 한 주기를 표현한 대표작 '미궁'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가야금을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두드리듯 연주하며 사람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를 표현하는가 하면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삽입되기도 했다.
이 같은 파격 때문에 1975년 명동극장에서의 초연 당시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며 소리 지르고 공연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 컴퓨터 게임 배경음악에 사용되면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 곡을 3번 들으면 죽는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의 작곡과 연주가 그만큼 색다르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임을 방증하는 일화들이다.
정제되고 격조 높은 가야금 연주 속에 거리낌 없는 혁신과 실험 정신이 담긴 그의 곡은 그래서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음악학자인 영국 셰필드대 앤드루 킬릭 교수는 "모순을 명상하는 선(禪)의 경지"라고 그의 음악 세계를 극찬했다.
고인 스스로는 "내 음악 세계는 깊은 산골에서 약수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는 청량음료가 아니라 첨가물이 하나도 없는 맑은 물, 그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장르 및 세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고인은 현대무용가 홍신자, 첼리스트 장한나, 작곡가 윤이상,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는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주변인들의 질문에는 늘 "기억되고 싶지 않다. 죽으면 깨끗이 사라지고 싶다"고 답하곤 했다.
sj997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