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사찰' 경주 황복사 웅장한 실체 드러났다
길이 57.5m 회랑식 건물터 확인…"경주에 없는 형태, 특수 용도"
조각미 뛰어난 십이지신상 4점도 90년 만에 드러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의 왕실사찰로 알려졌으나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경주 황복사(皇福寺) 터에서 웅장하고 화려했던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이 무더기로 나왔다.
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은 지난 8월부터 경북 경주시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 4천670㎡를 조사해 기다란 돌로 기단을 조성한 대형 건물지, 십이지신상 건물지를 비롯한 다양한 건물지와 유물 1천여 점을 찾아냈다고 31일 밝혔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2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했을 때 나온 금동사리함 뚜껑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임을 뜻하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글자가 나와 왕실사찰로 추정됐다.
발굴이 이뤄진 곳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로, 연구원은 앞서 2016년 이곳과 인접한 동쪽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해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무덤을 발견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건물지와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황복사의 건물 배치를 알려주는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확인됐다.
특히 돌로 기단을 쌓은 2호 건물지는 미발굴된 서쪽 지역이 있어 전모가 파악되지 않았으나, 남북 길이가 57.5m·동서 길이가 17.5m로 나타났다.
남쪽과 동쪽은 길이 150㎝, 높이 47㎝, 폭 50㎝ 내외의 잘 다듬은 장대석을 활용해 기단을 조성하고, 북쪽은 폭 20∼100㎝의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었다. 북쪽 중앙부에서는 돌계단도 발견됐다. 또 건물 내부에 회랑을 둘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김희철 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은 2호 건물지에 대해 "종묘의 월대처럼 기단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을 것"이라며 "이러한 형태의 건물지는 경주 지역에서 확인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종묘와 같은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황복사의 중심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호 건물지 서쪽에 맞닿은 1호 건물지에서는 십이지신상 4점을 사용한 기단이 발굴됐다. 십이지신상은 평상복 차림의 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로, 일제강점기인 1928년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가 발굴해 사진이 남아 있다. 이후 다시 땅에 묻혔다가 9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 부장은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과 비교했을 때 조각미가 뛰어나고 발달한 형태를 보인다"며 "김유신묘, 헌덕왕릉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는 8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십이지신상들은 효성왕의 미완성 무덤에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효성왕 무덤이 아닌 또 다른 왕릉에서 가져와 재활용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조사 지역에서 나온 유물은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신장상(神將像·부처를 수호하는 신장을 새긴 조각상), 장식기와인 치미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조사단은 이러한 유물을 근거로 황복사에 상당히 격조 높은 건축물이 있었고,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찰이 유지됐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건물 배치와 도로를 봤을 때 낭산 동쪽에도 방리제(坊里制·바둑판 모양 설계)가 적용됐음을 확인했다고 부연했다.
연구원은 올해 봄부터 이번 조사 지역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이 구역을 발굴할 계획이다. 조사 결과가 나오면 황복사 건물지의 성격과 규모가 더 자세히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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