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에 갇혔던 정강자의 50년 화업을 돌아보다
아라리오 서울·천안서 사후 첫 회고전…회화 눈길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쇠파이프에 가운데가 눌린 대형 솜 옆에 한 여성이 서 있다. 1968년 설치작품 '억누르다'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26살 정강자의 얼굴이 야무지다. 여성의 정체성을 품고 있는 목화솜과 이를 짓누르는 철제 파이프를 통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진 작품이다.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던 작품이 반세기 만에 다시 탄생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 놓인 재현작 '억누르다'(2017)는 지난해 저세상으로 떠난 작가를 대신해 관람객들을 맞는다.
정강자 사후 첫 회고전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가 30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과 천안에서 동시에 개막했다.
퍼포먼스가 예술이 아닌 기행으로 인식되던 시절,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막 졸업한 정강자는 동료와 벌인 과감한 퍼포먼스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1968년 5월 서울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진행된 국내 첫 누드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는 큰 파문을 낳았다. 5개월 뒤 부패한 문화예술 권력을 겨냥해 벌인 '한강변의 타살' 또한 "이 무슨 미친 짓"(경향신문 기사)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모두 한국 초기 전위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행위예술가로만 불리는 정강자의 작품 세계를 좀 더 넓고 깊게 들여다보기 위한 자리다. 서울에는 시대별 대표작을, 천안에는 최근작과 아카이브 위주로 배치했다. 설치작품뿐 아니라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회화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1970년대 번화한 명동 거리를 상반신 누드 차림으로 활보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1973년 명동'이나 어머니로서의 대지를 담아낸 '사하라'(1989), 옷고름을 풀어헤친 한복을 그린 '한복의 모뉴먼트'(1998) 등 다채로운 유화가 서울 전시장에 나왔다. 장르, 시대는 달라도 50년에 걸친 화업을 통해 한계의 극복, 성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작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서울 전시장 1층에서는 작가가 직접 촬영한 퍼포먼스 사진을 비롯해 각종 자료가 전시됐다.
아라리오 강소정 팀장은 30일 기자간담회에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1970년대 중반까지의 퍼포먼스와 해프닝에 한정돼 있어서 여러 작품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함께 의욕적으로 전시를 구상하던 작가가 지난해 여름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이번 전시는 사후 첫 회고전이 됐다.
아라리오 서울 전시는 2월 25일, 천안 전시는 5월 6일까지 진행된다. 문의 ☎ 02-541-5701(서울), 041-551-5100(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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