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의 '캡틴' 김일순 감독 "'보고 있나'는 사연이 있는 말"
2015년 팀 해체 앞두고 '메이저 8강은 가야 계속 같이한다'고 전해
"캡틴 사인 보고는 웃고 말았다…조코비치와 타이브레이크 때 감동의 눈물"
"정현은 고1,2학년때 15㎝나 훌쩍 커…스텝은 좀 더 보완해야"
(서울=연합뉴스) 김동찬 기자 = '캡틴, 보고 있나.'
28일 끝난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16강전에서 정현(29위·한국체대)이 노바크 조코비치(13위·세르비아)를 꺾은 뒤 TV 중계 카메라 위에 적어 화제가 된 문구다.
정현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삼성증권 시절 김일순 감독님과 약속했다"며 "팀이 해체되고 감독님 마음고생이 심하셔서 이렇게나마 위로해드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일순(49) 전 감독은 30일 "그게 사실 사연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현재 경기도 시흥 Han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팀장을 맡아 유소년을 지도하고 있는 김일순 감독은 "팀 해체 얘기가 나온 것이 (정)현이가 고3 때인 2014년이었다"고 회상하며 "그때 현이에게는 '우리가 잘하면 계속 갈 수 있다'고 얘기를 했는데 현이는 그걸 실제로 믿고 열심히 했다"고 돌아봤다.
그런데 마침 그해에 정현이 챌린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해에 어느 때쯤인가 현이가 '이 정도 하면 되나요'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야, 이걸로는 안돼. 적어도 그랜드 슬램 8강은 가야지'라고 지나가는 말로 둘러댔다."
어쩌면 그때 그 이야기에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8강에 오른 정현이 카메라에 대고 김 전 감독에게 마치 '보셨죠, 이제 진짜 8강에 갔어요'라고 말하듯이 사인을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 전 감독은 "그 이후에는 현이도 팀 해체를 받아들이고 사실을 다 알았지만, 처음에는 좋은 성적을 내면 다시 모일 수 있다고 믿었다"고 털어놓으며 "그래도 저희가 그걸 무슨 굉장히 '신파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물론 처음에는 다음 진로가 정해지지 않아서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지만 서로 신뢰가 있었고, 다들 흩어졌어도 각자 위치에서 잘하고 있기 때문에 팀 해체에 대해서 그렇게 오래 담아두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일순 전 감독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여자테니스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주니어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당시 세계 랭킹 6위 헬레나 수코바(체코)를 물리치고 16강까지 올랐던 경력이 있다.
또 1986년과 1990년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5개를 획득하는 등 한국 여자테니스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정현의 '보고 있나' 사인에 김 전 감독의 휴대전화에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지인들의 연락부터 언론사 인터뷰 요청까지 줄을 이었지만 김 전 감독은 연락을 피했다.
그는 "죄송하게도 전화기를 아예 꺼놨다"며 "대회 중에 제가 인터뷰를 하면 분명히 팀 해체 이야기를 물어오실 텐데 좋은 분위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어찌 됐든 삼성이 30년 가까이 테니스 불모지인 한국에서 테니스에 투자해서 시스템을 바꿨다"며 "그래서 사실 저는 현이의 '캡틴' 문구를 보고서는 저의 '캡틴'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의 '캡틴'은 바로 주원홍 전 대한테니스협회장이었다.
김 전 감독에 앞서 삼성증권 감독이었던 주 전 회장은 1992년 삼성물산 테니스단 창단을 이끌었고 이후 이형택, 조윤정, 전미라, 윤용일 등 한국 테니스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키워낸 인물이다.
김일순 전 감독은 "주 회장님과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예전 같으면 테니스인들만 기뻐할 일인데 이번처럼 온 국민이 테니스로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됐다'고 감격해 하셨다"고 소개했다.
김 전 감독이 정현을 처음 만난 것은 정현이 중3 때인 2011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워낙 빨리 받아들이고 변화 속도도 남달랐다"며 "어릴 때도 공을 치는 임팩트가 좋았고 영리한 경기 운영도 돋보이는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다만 "키가 170㎝ 정도라 작았는데 고1, 고2 그사이에 15㎝가 훌쩍 크면서 185㎝를 넘었다"며 "스텝이나 스윙 쪽이 그렇게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정신력이 좋은 선수라 뭔가를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부분이 뛰어난 선수"라고 덧붙였다.
이번 대회 로저 페더러(2위·스위스)와 준결승에서 발바닥 물집 때문에 기권한 것에 대해 김 전 감독은 "그게 사실 이번 대회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남자단식 결승전에도 발바닥 물집으로 고생했다는 것이다.
김 전 감독은 "현이가 공을 보는 눈이 빠르고 센스가 좋기 때문에 느리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공을 보는 눈에 비해 스텝이 따라주지 못해서 다리를 끄는 경우가 잦아 무리가 간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당장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며 "우선 관리를 잘 해줘야 하고, 스텝도 더 보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YNAPHOTO path='2060925n2654464_P2.jpg' id='PCM20060925011100999' title='1991년 현역 시절 당시의 김일순 감독. ' caption=''/>
평소 강인한 이미지의 김 전 감독에게 '혹시 이번 대회를 보면서 우시지는 않으셨냐'고 묻자 "사실 캡틴 그거는 그냥 웃고 말았다"고 하더니 이내 "조코비치하고 3세트 타이브레이크에서 5-3을 만들면서 환호를 내지를 때는 사실 감동이 밀려와서 울었다"고 쑥스러워했다.
"처음 만났을 때 키가 나보다 작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보다 훌쩍 커 있더라"던 몇 년 전 느낌을 김 전 감독은 이번 대회를 보면서 다시 느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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