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력 합해서 100년…오영수-정영숙이 그리는 '인생의 의미'
연극 '3월의 눈'에서 노부부로 호흡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국립극단이 다음달 7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리는 연극 '3월의 눈'은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중 하나다. 배삼식 작가가 쓴 이 작품은 손자를 위해 평생을 일궈온 터전이자 마지막 남은 재산인 한옥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는 노부부 '장오'와 '이순'의 이야기를 통해 사라져가는 것과 시간의 흐름 속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고(故) 장민호·백성희 배우를 위해 헌정됐던 연극 무대에 이제는 그들을 잇는 후배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주인공들이 80대로 설정된 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역에 선택된 이들은 원로배우 오영수(74)와 정영숙(71)이다. 오현경-손숙과 함께 더블캐스팅으로 무대에 서는 이들을 최근 용산구 서계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작품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이 없다. 대사도 많지 않아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연기가 아니면 밋밋하게 흘러가기 쉬워 배우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 작품이다. 또 장민호-백성희라는 대배우들이 섰던 작품이라 연기 베테랑들인 이들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무대다.
2011년 초연 무대 때 장민호와 더블캐스팅으로 출연했던 오영수는 "장민호 선생님 연기하던 게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초연 때는 장민호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났으니까 내가 좀 젊은 게 아닌가 싶었죠. 이제는 장 선생님 연기하던 게 자꾸 뇌리에 남아요. 장 선생님이 87살에 하셨죠. 그런데 저도 이제 74세이다보니 인생이 느껴지는 나이가 되서 적응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어요. 이 작품은 말과 말 사이에 숨어있는 침묵의 언어를 작가가 요구하는 것 같은데 초연 때는 그걸 느끼는 게 힘이 들었어요. 그게 나한테 체화되지 않아 부담스럽고 짜증나고 그랬는데 초연 때와는 조금 달라졌어요. 70대와 60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게 다르거든요. 이제는 버리고 간다는 것, 주고 간다는 게 결코 나쁜 게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나이니까요."
정영숙 역시 '너무 젊어보일까' 걱정이라고 했다.
"백성희 선생님 공연을 보긴 했는데 연극은 정말 배우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되기 때문에 그건 걱정이 안되는데…. 오히려 작품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건 연륜에서 나오는 모습을 내기가 아직 이르구나 싶어요. 이 작품은 연기보다도 연륜에서 나오는 삶 자체가 보여야 하거든요.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더 그렇죠. 2015년 공연을 봤는데 그땐 ('장오'역을 맡은) 박근형 배우가 너무 젊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어요. 삶 자체가 보여야 하는 게 가장 많이 신경쓰이더라고요."
두 사람의 연기 경력을 합하면 100년이 넘는다. 오영수는 군대 제대 이후 1967년 연기를 시작해 지난해가 연기 경력 50년이었고 대학교 4학년 때인 1968년 TBC 탤런트로 데뷔한 정영숙은 올해가 연기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두 사람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나이 든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내 나이에는 많이 하는 편이죠. 지난해에는 4편을 했으니…. 연극에서도 나이 70을 넘어가면 기성극단은 출연료 등이 문제가 돼서 잘 안써요. 그래서 소외되는 면이 있기도 하고…. 70대 넘어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는 연기자로서 70대가 가장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나이에 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건 안좋은 일이죠. 나이 먹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이 무대에 공존해 있어야 해요. TV나 영화도 다 그래요. 10대, 20대, 70대가 같이 어울리면서요."(오영수)
"백성희 선생님이 고령이셨는데 젊은 역할을 하시는 걸 봤죠. 연극은 그게 돼요. TV 화면에서는 안되지만. 그래서 그때 내가 그게 될 수 있겠다는 걸 (젊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죠. 또 TV 드라마도 나이 든 연기자들이 받쳐줘야 무게감이 있죠. TV든 뭐든 생활을 그리는 게 예뻐야 하는 게 아니라 생활처럼 리얼해야 하죠. 가끔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엄마 역할 하는 걸 보면 학예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정영숙)
50년씩 연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배역을 했다.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는지를 묻자 오영수는 대번에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먼'을 꼽았다.
"웬만한 건 다 해봤어요. 단 하나 못해본 게 세일즈맨이에요. 그건 기회가 한 번도 안 오더라고요. 내 나이 때 할 만한 건 셰익스피어, 파우스트 다 해봤는데 그것만 못했어요. 이제 나이 먹으면 더 못하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016년에 이순재 선배도 했거든요."
오영수는 1987년부터 2010년까지 국립극단에서 23년간 단원을 지내 국립극단과 인연이 깊다. 그만큼 국립극단에 애정이 많을 그는 최근 극단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전속단원제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청년 배우들이 자기 연극만 끝나면 그만인 것 같아요. 국립극단이 한 나라 연극의 중추로 서 있으려면 그런 의식을 가진 단원들이 있어야 하고, 연기자로서 국립극단 단원이라는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연극배우들이 영화나 TV 드라마를 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로서 국립극단에 가겠다는 그런 지향점이나 목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안돼서 아쉬워요."
연기 한 길을 걸어온 원로배우들은 후배들을 위한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정영숙은 "뭐든지 한길을 가라"고 당부했다.
"우리 직업이 눈 돌릴 데가 많아요. 잘못하면 정말 반짝하다가 말 수도 있고…. 그런데 지나고 보니 뭐든지 한길로 가면 이뤄지더라고요. 후배들도 연기를 연마할 때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오영수 역시 "연극을 하든, TV 드라마를 하든, 영화를 하든 어떤 생각을 하고 연기를 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극을 하다 TV로 가더라도 어떤 생각을 하고 연기를 계속해나가느냐가 중요하죠. 여기서(연극무대에서) 잘해서 TV에 가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함몰돼서 한 5∼6년 가다 보면 지향점이 없는 친구들은 반짝하고 소모품처럼 사라지는 것도 봤어요. TV도, 영화도 하되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허겁지겁하다 보면 자기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거든요."
연극 '3월의 눈'은 3월11일까지 공연된다. ☎ 1644-2003.
zitro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